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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04. 2022

봄, 제1악장 알레그로 Allegro

비발디의 봄은 빠르고 경쾌하게 시작한다. 주제부의 총주가 앞서고 뒤이은 바이올린의 독주가 봄이 왔음을 알린다. 총주는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지만 매번 길이나 느낌이 다르다. 그 뒤엔 새들이 지저귀고, 얼었던 샘물이 녹아 졸졸 흐르고, 산들바람의 경쾌한 독주가 트릴과 스타카토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폭풍의 트레몰로가 격렬하게 교차하지만, 곧 악천후는 지나가고 새들은 다시 노래한다.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모든 악기가 연주하고 활기차게 봄은 번져간다.


땅이 움직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나무들은 물을 길어 올리고 꽃눈을 틔우느라 웅성거린다. 땅속의 무수한 씨앗들도 흙을 뚫고 일어설 준비에 꽤 부산한 눈치다. 저들이 봄을 준비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눈이 저절로 떠졌을 게다. 아직 밤이 남아있지만 의식은 새벽처럼 점점 밝아 오고, 창밖에는 푸르스름하게 동살이 잡힌다.


청해봐야 더 이상 잠은 올 것 같지 않아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낼까 고민에 빠진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잠시 내 삶에서 떠나 전혀 새로운 시공간에 와 있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진다. 만물들이 봄을 맞이하는 에너지가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이 새벽 시간이 내겐 몹시 낯설다.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새벽잠을 깨우던 소리 없는 소요가 비로소 귀로 들리고 호흡으로 느껴진다.  


아파트 뒤에는 가볍게 등산하기에 좋은 산이 있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산길이 훤히 내다보여 매일 눈으로만 산을 오르내린다. 날씨가 조금씩 순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침이고 점심이고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도 새벽부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부지런한 그들을 늘 구경만 하다가 오늘은 따라나서고픈 충동이 인다. 대체 무엇이 있어 그들을 부르는지 궁금증을 이기다 못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모자 하나를 폭 눌러쓰고 현관문을 열었다. 잎샘을 하는지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온다.


아침 안개로 촉촉해진 흙을 밟는다. 등산로를 따라 잠시 오르던 그때다. 땅에서 겨우 5센티미터나 자랐을까. 아직 아무것도 싹트지 않은 황량한 숲길에 잎도 없이 샛노란 꽃 두 송이가 생뚱맞게 올라와 있다. 차라리 땅에 떨어져 있다는 표현이 제격일 듯싶게 꽃만 똑 따서 놓아둔 것 같다. 밟히면 어쩌려고 하필 등산객들의 왕래가 많은 길섶에 애면글면 피었는지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여린 꽃대로 어떻게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왔을까.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살펴보니 눈 속에서 핀다 하여 얼음새 꽃이라고 불리는 복수초다.



이름을 처음 들을 땐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시무시한 복수의 전설을 떠올리기 쉽지만 한자로는 福壽草다.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응보(應報)의 복수(復讐)가 아닌 우리 조상들이 즐겨 주고받았던 오복(五福)의 그 복수(福壽)다. 이른 봄 겨울을 몰아내고 화사한 봄소식을 전하는 노란 꽃의 모양이 복을 날라다 주는 천사의 날개와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뿌리로부터 꽃줄기를 내보내어 노란 꽃봉오리를 터트리는데, 갓 돌 지난 아이의 엄지손가락만 한 꽃잎이 포개어 피어난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작은 연꽃을 닮았다. 그래서 설련화라고도 부르는가 보다. 이 낫낫한 것이 백화난만한 봄의 한 복판에 피지 않고 어째서 언 땅이 채 풀리기도 전에 피는지, 자연의 뜻이 참으로 매정한 듯싶다.


한동안 나의 별명은 저주받은 손이었다. 기껏 선물 받은 화분도 자꾸 죽여 버려서 생긴 별명이다. 얼마 전에도 햇빛 아래 놔두고 가끔씩 물만 주면 잘 자란다는 화초를 들여놓았다가 아니나 다를까 곧 저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물주는 날짜도 화원에서 일러 준대로 맞춰 주었고 볕도 골고루 쬐어주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는지, 내 손의 저주는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깊은 마음을 주지는 않고 거저 꽃을 보겠다는 욕심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과유불급이라고 했건만 볕도 듬뿍, 물도 철철 넘치게 주는 게 좋은 줄 알았던 나의 무지 때문이었을 게다. 저들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길들이려 했다는 것을 알면 꽃들이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화초를 길러 보겠다는 꿈은 언감생심이다. 그저 뒷산과 아파트 화단에 철 따라 피고 지는 것들이나 감상하고, 꽃이 그리울 때는 집 근처에 있는 화훼 공판장을 찾아 실컷 눈요기를 하고 한아름 들고 돌아온다. 농사짓는 사람이 누런 들 앞에서 미소 짓는 것은 단지 풍족한 수확의 기쁨 때문만은 아닐 게다. 풍만한 농작물이 주는 미적(美的) 만족감도 한몫 톡톡히 하지 않을까. 비록 내 손으로 꽃 한 송이 피워내지 못하지만 남이 피워 낸 것이나 숲길에서 풀꽃을 만나면 살가운 눈길을 건넨다. 아니, 오히려 저들이 내게 다정한 눈빛을 넉넉히 흘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심 없고 어리눅은 자연의 심성을 배우고 나면 그때는 내 손으로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있을까. 아니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꽃 한 송이 제대로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질 수 있을까. 힘껏 봄꽃 향기를 마시면 욕심 가득한 몸의 진액이 저 꽃들의 수액처럼 투명하고 향긋해질까.


이제 비발디의 봄은 느린 솔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2장 라르고 Largo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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