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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an 11. 2022

인공눈물

삶은 신파를 구한다.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증거라고 생텍쥐페리가 말했듯이 사는 것이  신파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조금 고상하게 포장하자면 비극 정도가 될까. 그 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 엔드를 꿈꿔보지만 현실은 성냥불로 언 손을 녹이려는 소녀만큼이나 눈물겹다.


신파란 뭔가. 통속이다. 그렇다면 통속적이란 뭔가. 대중의 세속적이고 천박한 취향에 붙좇아 예술성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기 일쑤고 사랑도 증오도 마음이 오가는 대로 그때그때 다 드러내 버린다. 그렇게 감정의 아드레날린을 한껏 분출하며 그 안에서 도취되는 것이 우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신파는 빛을 발한다. 신파를 표방한 영화들은 막이 오르기 무섭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시종일관 얼굴을 쓸어내린다. 아마도 사는 것이 팍팍한 때일수록 이런 신파극은 대중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연히 예전 인기 드라마를 잠시 보다가, 말 그대로 신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다.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억척스럽게 고생만 했던 아내는 암에 걸린다. 그것도 모른 남편은 갖은 방법으로 구박을 하다 아내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스토리는 갑자기 순애보로 대반전을 해 잘못을 뉘우친 남편은 죽어 가는 아내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결국 ‘그래도 내 인생은 장밋빛’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는 숨을 거둔다. 대놓고 울어보자고 만든 것일 테다. 실컷 울게 하고 ‘그 후 1년’이라는 감정 정리를 할 수 있는 미덕까지 베풀면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관객은 비극의 완성을 통하여 현실의 삶에 대한 대리만족과 묘한 희열을 느낀다.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울고 슬퍼하면서 행복을 얻는 것이다. 이른바 눈물의 카타르시스다. 한껏 고조된 감정이입으로 주인공의 비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눈물 속에서 감정이 정화되고 그 순간 시원함을 느낀다.


사회적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나이일수록 이런 신파극의 유효성은 커진다. 직장상사와의 갈등, 가족 간의 불화,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과도하게 짓눌린 내면의 자아가 비명을 지를 때, 누구나 한 번쯤은 '어디 가서 목 놓아 울고 싶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등에는 ‘나이 값’이라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어디 가서 함부로 눈물을 내 비칠 수 없게 된다.


퉁퉁 붓고 발갛게 충혈된 눈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무엇이 나를 울게 하는가, 라는 꽤나 철학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신파에 지나지 않는 드라마를 보며 내일 출근이 걱정되도록 울어 젖힌 것은 비단 드라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울고 싶은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핑계 없이는 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울기 위해 일부러 슬픈 영화를 보러 간다는 사람들처럼 그랬을 것이다.


어릴 때는 툭하면 잘 울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눈물바람 한다고 어머니께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울 수 있었다. 일단 한번 울기 시작하면 심혈을 기울여서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부적절하게 눈물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울고 나면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걸 깨닫고 난 후부터 나의 눈물연기는 리얼리티를 더해갔다. 그러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고 울고 난 후, 극에서 극으로 마음이 움직이며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나름대로 즐기지 않았나 싶다. 산길 끝나는 곳에 쉬어가라는 암자가 있듯이 울음 뒤에 오는 편안한 쿠션이 좋았던 것이다.


핑계가 없으면 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남에게 눈물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창피스러워졌다. 울고 싶은 이유래야 그저 사는 게 고단하거나, 생을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한대서 오는 신파의 에센스일 뿐이지만 아이들처럼 아무 데서나 목 놓아 울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보니 눈물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울기 위한 근사한 변명거리를 종종 찾아 헤매지만 쉽게 만나 지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신파스러운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뿐이다. 그야말로 인공눈물인 셈이다.


삶이란 것은 기쁨과 슬픔을 태우면서 간다. 이 두 대극이 균형을 이루어야 제대로 된 삶의 항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일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우리는 평소에는 그 순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생의 가장 힘든 부분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눈물 흘리며 그 순간순간이 행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릇 인생이란 길 위에서 찾아지는 거라 했지만, 아니다. 모두가 기면 발작증에 걸려 도로 위에 널브러질 필요가 대체 뭐란 말인가. 간접경험도 충분한 경험이고 보면 마지막까지 가보지 않아도 위대한 이야기꾼들을 통해서 현재를 되돌아볼 수 있다. 해서 통속적인 신파를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공감을 사는 것일 게다.


삶은 신파를 구한다. 물론 신파의 과잉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어차피 삼류 신파라는 속설은 그 어떤 현인들의 문구보다도 우리네 삶을 꿰뚫고 있다. 슬픔이 주량을 넘으면 누구나 지랄을 내는 법인데 눈물을 차곡차곡 쌓아 둔다고 웃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처럼 인공 눈물이라도 흘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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