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삼촌 / 현기영
“4·3을 이야기하지 않고선 문학적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겠다는 딜레마를 느꼈다. 4·3을 쓰고 싶었다기보다 의무감, 부채감이 무겁게 억눌렀다." - 「순이 삼촌」 작가 현기영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맞추어 8년 만에 고향인 제주를 방문한다. 그리고 순이 삼촌이 얼마 전 삼촌 자신의 옴팡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순이 삼촌은 불과 두 달 전까지 1년간 ‘나’의 집에서 살림을 봐주다가 다시 제주도로 내려간 친척 아주머니인데, 그새 돌아가신 것이다. 모인 친척들과 자연스레 3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30여 년 전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경 측에서 무리하게 작전을 벌인 결과로 마을 사람 오륙백 명이 학살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순이 삼촌 역시 학살의 현장에 있었으나 가까스로 혼자 살아남는다. 공비와 군경은 밤과 낮을 바꿔가며 양민들을 괴롭혔다. 그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간 남편으로 인해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해던 순이 삼촌은 경찰에 대한 기피증이 생기고 평생 환청 증세에 시달렸다.
30여 년 전 죽은 자식들이 묻힌 옴팡밭에서 눈을 감은 순이 삼촌의 비극적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예견된 것이었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劉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라는 ‘나’의 말은 해방과 분단의 혼란기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중의 삶을 환기한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1978년 발표된 작품으로, 1949년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마을에서 500여 명의 주민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북촌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순이 삼촌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갖게 된 제주도민의 상처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은 ‘나’에게도 어두운 유년을 환기하는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다.
섣달 열여드레 그날 해 질 녘이 다 되어서 군인들이 두 대의 스리쿼터에 분승해서 떠난 다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대로 운동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조회대 뒤 우익 가족이 있는 데로 몰려 살아남은 가족끼리 서로 붙안고서 마을에서 들려오는 타 죽는 소 울음보다 더 질긴 울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내 입에서도 겁먹은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운동장의 진창 흙은 함부로 내달린 스리쿼터 바퀴 자국으로 여기저기 무섭게 패어 있고, 벗겨진 망월표 고무신짝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밀려와 땅거죽이 붉게 물들었다. 교실 창이 이내 벌게졌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늘 가득히 붉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불기운에 압도되어 더욱 서럽게 곡성을 올릴 뿐 누구 하나 울타리께로 가서 불타는 마을을 직접 내려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P. 86
주민들을 모아 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던 군경, 불타오르던 마을과 사람들의 울음소리,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 때문에 제삿날이면 한밤중의 곡소리를 들어야 했던 기억, 시체가 썩어 거름이 된 밭에 유독 크게 맺히던 고구마 등 고통의 역사는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섣불리 들고 나왔다가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달 전 자살한 순이 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제주 4·3 사건의 여파가 지금까지 제주도민들에게 어떤 정신적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문학으로 고발했다.
“위령, 진혼……. 나는 문학으로 억울하게 쓰러져 간 영혼을 달래는 무당입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할 것입니다.” -현기영
4·3은 제주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다. 해방 당시의 우리 민족이 겪었던 민족적 모순이 제주라는 섬에서 집약된 사건이다. 그런데 왜곡되었었고, 오랜 세월 주류의 역사로 편입시키지 않았었다. 아직도 제주 4·3을 모르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 떼죽음 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 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기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 가면서 폭동을 진압해 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디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 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P. 85
지나간 역사는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역사는 그 사실을 직시해야만 되풀이되지 않는다. 4·3이 더 비극적인 이유는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는 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 또는 가족을 이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있다. 상생과 진실 규명이라는 어찌 보면 이율배반적인 이 화두를 현기영은 「순이 삼촌」 속에서 녹여낸다.
‘나’의 고모부는 제주에 들어왔던 서북 청년단 출신으로 제주 사람인 고모와 결혼하여 정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날 당시 그는 토벌군으로 근무했고, 이 학살의 원인을 시국 탓으로 돌린다. 증오는 또 다른 혐오를 부른다. 나아가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증오를 거두는 법, 화해하는 법과 상생하는 법 또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제주는 특유의 푸른 바다와 검은 돌담,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어우러져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그러나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던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던 그때를 그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순이 삼촌」은 4·3의 참혹한 현실과 그 후유증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작품이고,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사건을 수면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된 소설이다.
제주의 북촌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붉은 화산 송이 위에 누워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우리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아래로 향하고, 그 위를 걷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진다.
잊으면, 잊힌다.
영영 잊히기 전에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고, 잘못된 것을 직시하는 용기만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이 아닐까. 역사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낼 때, 역사는 비로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