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노동자의 이야기

나의 초록목록, 숲을 읽는 사람 / 허태임

by 마루
각종 지도 앱에서 제공하는 정식 등산로 넘어 길이 표시되지 않은 구간이 주로 내 일터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디지털의 혜택은 딱 거기까지다. 대신에 그때부터 나는 예상 소요 시간을 넘겼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된다. 길이 없는 곳에 사는 식물들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만드는 게 나의 일이니까. -『숲을 읽는 사람』중


식물학자 에세이를 읽었다. 『나의 초록목록』은 몇 달 전에,『숲을 읽는 사람』 은 며칠 전에. 마침 평산책방에서 허태임 박사의 북토크가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다. 나는 식물이나 동물의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자주 보는데, 특히나 식물학자들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동물과의 교감은 그래도 어느 정도 주고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식물과 교감이 가능할까 싶어서다. 나는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식물과의 교감은 짝사랑 같은 걸까? 식물과 교감하다 보면 응답이 오긴 올까? 물론 그렇다고 한다. 정성을 쏟은 만큼 꽃도 달리고 열매도 맺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을 '초록 노동자'로 칭하는 작가의 정의가 참 신선하다. 전국 각지를 탐사하고 식물을 기록하는 자신의 일을 천직이라 생각해서 붙인 별칭이 아닐까. 꽃은 좋아하지만 풀들에 대해선 문외한인 내게, 특히나 수필을 쓰는 내게는 참 귀한 책이다. 곧 발간될 수필집에도 식물이야기가 몇 편 등장하는데, 내가 쓴 글들은 그들의 생태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식물에 대한 보편적 생각을 적은 것일 뿐이다.


허태임 박사의 『나의 초록목록』은 아마도 나의 목록이 될 듯도 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식물들을 보게 되는데, 이 책이 있다면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의 초록목록』이 풀과 나무에 대한 기록이라면,『숲을 읽는 사람』은 식물 분류학자인 자신에 대한 기록이다. 왜 식물분류학을 공부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여러 가지 식물들과 교감을 나누었던 사례들을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원래 글을 쓰고 싶었다고 수줍게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분이었다.


경북 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허태임 작가는, 사라질지도 모를 식물들을 지키기 위한 연구와 건강한 숲의 생태를 복원하고 있다. 또 현재 산불 피해가 극심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조사하고,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복원은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숲의 원 상태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라 더 반갑고 안심된다.


식물은 늘 그 자리에 서있다. 하지만 어제 보았던 나무가 진짜 어제의 모습 그대로일까. 허태임 작가는 '계절과 습도, 햇빛의 양 등에 따라 늘 다르다'라고 말한다. 일이 좋아 일과 결혼했다는 말이 있듯이 허태임 작가는 분명 식물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여릴 것 같고 단아한 실제 모습과 다르게 고등학교까지 시골에 살면서 할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식용과 약용이 되는 식물들을 할머니께 배웠으니, 할머니가 첫 식물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식물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나 싶다.


너도바람꽃을 보기 위해 산 꼭대기를 오르내리고, 팽나무 연구로 학위를 받았을 만큼 팽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 군락지를 보기 위해 울릉도 탐사에 공을 들인다. 산에서 길을 잃기도, 갖가지 짐승과 벌레들에게 물리기도 하지만 식물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다.


"저는 모성의 절정을 식물, 꽃의 구조에서 찾아요. 동물의 몸이랑 똑같죠. 포유류 암컷의 몸이 잉태할 난자를 지키기 위해서 자궁이 있고, 자궁 주변을 장기들이 싸고 있잖아요. 그걸로도 모자라서 골반 뼈가 튼튼한 것처럼, 꽃이라는 구조도 장차 씨앗이 될 밑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씨방을, 그 자방(子房)을 꽃받침이 싸고 있고 부수적으로 달리는 게 꽃잎이죠. 그 씨앗의 근원과도 같은 밑씨를 지키기 위해서 겹겹이 구조화된 것이죠. 수분 매개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향기를 발산하고 더 아름다워지는 이런 행위들을 보면, 식물이 정말 처절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걸 느낍니다. 그렇게 지구에 적응한 전략들을 보면 인간은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숲을 읽는 사람』을 읽으며 식물분류학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혹은 낯선 '너도바람꽃, 찔레꽃, 붉나무, 박주가리, 미선나무,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등이 책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나는 경험을 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산불피해가 극심했다. 기후위기와 인간중심의 개발로 인해 숲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요즘, 우리보다 그 현장을 직접 바라보는 허태임 작가의 마음은 더 편치 않을 게다.

특히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는 세계에서 단 2곳뿐인 '시드볼트'가 있는데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불린다. 시드뱅크는 때에 따라서 씨앗을 넣고 뺄 수 있지만, 시드볼트는 지구가 멸망해야 비로소 열린다. 시드볼트가 열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오늘도 지구 위를 날아다니는 저 미사일들을 보고 한가한 소릴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구가 멸망해서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진다고 해도 식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아니 우리가 사라지면 식물은 더 번성할 것이 분명하다.


식물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사랑의 끈 같은 것을 생각한다. 서로를 잇고 있는 끈을, 겨우내 눈 속에 묻혔던 씨앗은 다음 봄이 오면 되도록 좋은 유전자를 고루 섞은 새로운 싹으로 피어난다. 그 싹은 군락을 키우고 영토를 넓히는 방식으로 힘을 보태 세대를 잇는다. -『숲을 읽는 사람』중


사라질지 모르는 식물들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의 삶은 비단 한 명의 학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팔 걷고 나서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도시의 자투리에서 불쑥불쑥 돋아나는 들풀과 들꽃, 앞산 뒷산에 한결같이 서 있는 나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거창한 이름의 식물학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수많은 '초록 노동자'들이 걸어가는 길에 우리도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 요즘이다. 우리가 사라져도 식물은 남지만, 식물이 사라지는 그날 우리도 사라질 테니까.


오늘, 우리 아파트 화단 벚나무의 첫 꽃망울이 터졌다.


금요일 연재
이전 20화불행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