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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31. 2022

비 오는 날의 풍경

누군가는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했다. 하늘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빗발을 향해 우산을 받치고 물웅덩이를 날듯이 뛰어넘을 때 튕기는 빗방울이 상쾌하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난 그 웃음이 더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비 오는 날이 좋다. 단, 안에 있다면.


그 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아니 내가 그 사람과 만났던 몇 달 동안 비가 많이 온 것이다. 일주일이나 이주에 한번 정도 만났지만 그때마다 대부분 비가 왔다. 그 배경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과의 만남은 늘 서늘했고 마음이 더워지지 않았다. 난 커피 향이 좋은데 그에겐 늘 민트향이 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비가 내리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안으로 틀어박히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는 자기가 근무하는 명동에서 내가 일하는 여의도까지 달려왔다. 나가지 않았으니 짐작할 뿐이지만 그는 황당했으리라. 누구나 몇 번씩은 스쳐 갈 싱거운 만남과 이별이었다. 그 후 한 번인가 두 번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떠올린 것 같기도 하다.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오랜만에 명동에 있는 한 호텔 라운지에 갔다가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와 마주쳤다.


"어? 혹시."

"아!"

"맞지?"

"네, 맞아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건너뛰진 못했지만 반가웠다.

옛날 그는 그 호텔 계열의 여행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곳에서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양복 깃에 그 여행사 배지를 달고 있었다.


"어디 살아?"

"부산에요."

"서울엔 자주 와?"

"아뇨. 자주 안 와요."

"결혼은 했지?"

"아뇨."

"...."

"아마 안 할 것 같아요."

'안'과 '못'의 차이를 잠깐 생각했다.


나는 원래 체온이 조금 낮은 사람이다. 건강상의 문제인지 성격상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독감에 걸렸을 때 딱 한번 체온이 38도를 넘은 적이 있을 뿐, 늘 35도 언저리에 있다. 그날도 몇 마디의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고, 상상 속의 민트향 같은 것은 나지도 않았다.


사랑을 손쉽게 여기던 나이에는 아랑곳없이 나의 사랑만 소중했다.  번의 만남들과 이별들을 돌이켜보니 소중했던 것은 떠나가고, 기다리는 것은 오지도 않고, 바라지 않던 일은 자주 내게 찾아왔다. 겨울이 가면 이렇게 봄이 오는 것처럼 사람이 떠난 자리엔 다른 사람이 오기도 하던데, 용기도 없고 실패도 두려웠던 나는 무엇인가가 내 첫 번째 걸음을 인도해 주길 바랐다. 그러면 뒤돌아 보지 않고 내달리자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이제 혼자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다음 내게 사랑이란, 낡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불편하다. 정상적인 차선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 위안한다. 인생이란 어차피 정상이란 이상을 놓고 비정상을 끊임없이 조절해 나가는 과정이 되풀이되는 것이니까. 해서 지금 이대로의 심심하지만 평온한 행복도 그리 나쁘지 않다.


비 오는 날의 풍경을 안에서 보면 사람보다도 자연이 더 아름답다. 평소에는 시커먼 먼지를 쓰고 있던 아스팔트가 비에 씻겨져 반들거리고,  때맞춰 핀 흰분홍 꽃들과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웅덩이에는 하늘이 비치고, 건물들은 말끔히 목욕을 해 빛난다. 가로수도 물을 먹어 한 숨 돌리고 비에 젖어 흔들리는 거리 풍경은 그림 같다. 게다가 걸어가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우산들은 비 오는 날의 꽃이 된다. 


오늘 비엔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 볼까 싶어 제비꽃 색의 우산을 찾아든다. 안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밖에서 보면 나도 그 풍경 중 하나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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