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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19. 2022

인생 띠지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어떤 문구가 적당할까

'발간한 지 30년 이상 된 책이 아니면 읽지 않는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이 나도 신간을 바로 자리에서 읽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사서 책장에 꽂아 놓았다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숙성시켜서 읽는다.  낯선 작가, 검증되지 않은 작가들의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에세이는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궁금해 자주 사서 읽는다. 그리고 각 연령대에 맞게 기획되어 나오는 자기 개발서나, '~하는 법' 같은 책은 절대로 읽지 않는다.

 

또 나는 한 번에 한 권의 책만 읽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 두어 권과 에세이, 동서양 고전이 된 책과 시집 한 권 정도를 매일 조금씩 시간을 달리해서 읽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과 읽는 책도 있고, 낮에 햇볕이 좋을 때, 잠들기 전에 읽는 책이 다르다. 또 쉬는 날에만 읽는 책도 다.


이렇게 읽는 것은 작가들에 대한 내 나름의 존경이기도 하다. 그들이 쓴 시간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나도 글쓴이들의 시간과 공간을 떠 올리면서 꽤 공을 들이고 읽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 독서법에 혀를 끌끌 차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읽은 책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낭패다. 무한정 책장을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책을 어느 정도 솎아 내려고 꺼내 놓았다가 다시 읽어보고 도로 집어넣기가 일쑤다. 그 책을 읽었던 내 시간들이 오롯이 떠올라, 한 권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책 띠지. 나는 책 내용이 한 문장 혹은 두 문장으로 요약된 책 띠지 성애자다. 책 띠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고 책을 읽을 때도 따로 빼놓지 않는다. 빼놓았다가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불편해도 띠지를 끼운 채 읽는다. 가끔 좋아하는 책의 띠지를 찾아 책장을 다 뒤집어 놓기도 한다. 일종의 저장 강박인가 싶기도 하다. 띠지 그게 뭐 대수랴 싶다가도 어쩔 수없다. 현대인들 누구나 정신병적 요소는 하나씩 안고 사는 법이니까. 이 정도의 병증이면 뭐 양호한 편이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한다.


역량이 있는 작가들의 띠지에는 그들의 좋은 문장이 쓰이지만, 대부분의 책 띠지에는 출판사에서 고심한 상품성 있는 문구를 내놓는다. 가끔 절묘한 문장이 쓰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사기다 싶은 문장도 더러 만나고, 이 책을 쓴 작가는 낯 뜨겁겠다 싶은 문장들도 만난다. 어쨌든 책 띠지는 그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한 문장이고, 또 책을 읽는 가이드 역할도 한다. 그리고 요즘 책 띠지들은 형형색색 예쁘기도 하다.


오늘도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되어 온 책들을 정리하다가, '내 인생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어떤 문구가 적당할까'라는 질문이 하루 종일 비구름처럼 머리 위에 떠 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은 담백한 문장이면 좋겠는데. 내 인생의 띠지엔 무엇이라고 써야 할지 떠오르는 문구가 없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기 때문일까?


예전에 어느 문학 평론가가, 수필 문예지에 실린 내 에세이 <살리에리가 쓰는 아리아>에 대해서 평론을 쓰신 적이 있다. '욕망의 샴쌍둥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리고 수필가'라는 부제로,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탐욕으로 대치한 부분에 대하여 욕망의 포기 방법이 안쓰럽다고 표현했다. 글을 쓰는 사람, 문장가, 수필가의 운명을 각인시킨 글이라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욕망의 범위를 줄여 가는 것은 모든 글 쓰는 이들의 운명이라고 했다. 수필에는 대 자아에 대한 몰입보다는 소 자아에 대한 친절이 필요하다고 끝맺는 그 평론을 읽으면서 스스로 다독다독했던 기억이 봄햇살처럼 아련하다. 그때로부터 한 문장도 제대로 건지지 못한 나의 인생 띠지엔 이런 문구가 제격일지도 모르겠다.


'평평범범한 문장만을 실컷 남긴 살리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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