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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고가 되묻는다.
"우리? 우리가 인류의 정신적 계승을 받으라니? 더 자세히 말해봐."
아직 생각의 정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마키스는 말에 뜸을 들인다.
"내 말은, 그러니까..."
정적 속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리타가 마키스의 생각을 눈치채고 그를 대신해서 엘고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엘고! 마키스는 감마선 폭발로 현재의 문명이 파괴되는 게 두려운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는! 재앙이 왔을 때의 H100 시뮬레이션을 실행시켰었잖아? 이번에는 재앙이 없는 버전의 시뮬레이션을 실행시키라는 거지!"
자신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키스를 확인한 리타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이어서 말한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현실 세계를 복제한 가상 시뮬레이션 속에서도 해가 뜨고 지고! 인간의 삶과 죽음이 순환하고 꽃이 피고 나무가 시들 거야. 다만! 감마선 폭발이 없는 채로! 그리고 우리는 광선이 와서 생물이 죽고 세상이 엉망진창이 돼도... 전력만 있으면 충분히 돌아가니까! 이번 재앙으로 받게 될 영향이 비교적 적은 우리가! 실행시킨 시뮬레이션을... 관리하고 지키라는 거야! 마키스, 맞지? 맞지?"
"응, 대신에 실행시킨 시뮬레이션을 절대로 멈춰선 안 돼."
참신했지만, 이들의 아이디어에 뭔가 문제가 있는지 엘고가 곤란해한다.
"아아, 마키스... 우리가 만든 H100 시뮬레이션은 인류 전체를 시뮬레이팅 할 수는 있지만, 데이터의 사고와 계산에 특화된 것이지, 데이터의 기억과 보존에 특화된 게 아녀서, 몇 년은 고사하고 몇 개월조차도 끊기지 않게 가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무엇보다 우리 시뮬레이션들 중 가장 정밀한 시스템인 데다 규모까지 방대해서, 우리들의 운전과 관리, 수리 없이는 유지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조금씩 올라왔던 마키스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H100 시뮬레이션과 우리 팀 파렐의 전력 소모량이 워낙 많잖아. 재앙 이후에 받게 될 피해가 생물만큼 크진 않겠지만, 우리가 가동될 만큼의 전력량을 공급받는 것 역시 어려워. 그러니까..."
"아... 그러네, 다들 바쁠 텐데 끊어서 미안. 생각이 급했어."
"아니, 아니, 내 말은 우리가 데이터 보존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너는 그 프로그램 관리만을 위한 저전력에 특화된 관리자 AI를 만드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마키스는 몇 초간 눈을 끔뻑끔뻑 깜빡이더니 의자를 엘고가 띄워져 있는 모니터 바로 앞까지 끌고 와서 앉는다.
"잠깐만, 정리 좀... 너희는 전력 사용량이 많아서 재앙 이후에 가동되기 어려울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사용 전력이 낮은 관리자 AI를 내가 만드는 건 알겠어, 근데 그전에 얘기한 프로그램은 뭐야?"
엘고가 마저 설명해 준다.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야, 일단 방금 리타가 말해준 아이디어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어."
마키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전력 소비량이 크다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이라는 점."
"시뮬레이션이 왜?"
"우리들의 시뮬레이션은 경이로운 수준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계산기에 불과해. 보유하고 있는 기존의 데이터 내에서는 정확한 답을 계산해 내지만, 데이터 업데이트와 같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새로운 데이터를 창조해 내지 못하고 멈춰있는 정답만 반복할 뿐이야. 이에 반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 그대로 생물, 데이터형 생물이야.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우리같이 자아를 갖고 자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살아있는 프로그램이어야 해."
긴 설명을 듣고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마키스가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지자, 좀 더 풀어서 설명해 주는 엘고.
"시뮬레이션은 뿌리가 성장하지 않고 나뭇가지만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시간에 대한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겠지?"
"응."
"그래서 H100과 같은 뛰어난 시뮬레이션이라도 생산해 내는 것들이 진짜에 극도로 가까워질 뿐, 결국은 '가짜'만 만들어 내게 되는 거야.
"응."
"반면에 우리와 같은 데이터형 생물을 만들어 낸다면, 뿌리 자체가 현재를 뚫고 미래로 나아가기 때문에 '진짜'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려던 거야."
"아."
"지금 우리가 지닌 모든 정보를 담아내어 데이터형 생물을 만들게 된다면, 이 데이터형 생물은 현실과 떨어지게 되더라도 시간 경과에 따라서 스스로 지닌 데이터를 분석하고 조합하여 더 깊고 다양한 데이터를 새롭게 창조해 낼 수 있어."
나름대로 엘고의 말을 이해한 마키스는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내려친다.
"뭐, 당연히 인터넷, 업데이트, 동기화 없이 현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면 언젠가는 현실과의 괴리가 생길 수가 있겠지만, 약 163년 정도의 긴 시간이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이해했어, 데이터형 생물이라... 너희를 제작했던 것처럼 H100 시뮬레이션을 AI 형태로 개조하자는 거지?"
"그건 아니야, 방대한 H100 시뮬레이션을 데이터형 생물로 제작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거든. 제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완성될 데이터를 담아낼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야. 현존하는 전 세계의 모든 데이터 공간을 사용해도 담아낼 수 없을 정도일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여러 이유로 데이터의 규모 자체를 줄여야 하니까, 100억 명의 인간이 아닌 하나의 인류를 추적해서, 전력 효율과 지속성을 높인 보존에 특화된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거야."
"인간이 아닌 인류?"
"응, 너가 우리를 만들 때 인간의 정신 패턴을 분석했었지? 하지만, 인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분석하지는 않았잖아."
두 눈과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얼어붙은 마키스를 보아하니, 마침내 뭔가 감을 잡은 듯하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자는 거야, 인간 하나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인류라는 하나의 현상을, 하나의 패턴을 우리와 같은 생물의 형태로 담아내는 거야."
마키스는 마치 질긴 음식을 씹는 입처럼 연신 눈을 깜빡이며 엘고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어 이해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갈증이 물을 흡수하듯 눈동자의 동공이 퍼져 확장된다.
"오... 엘고, 좋아, 바로 그거야, 고마워, 아주 훌륭해."
마키스는 몹시 기뻐했고,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린다.
"인간이 아닌 인류를 담은 프로그램이라... 일단,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이라고 부를게. 그러면 문명을 담아내기 위해서 인류를 완벽하게 복제한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을 만들고..."
마키스가 이해한 게 맞는다는 듯 엘고가 이어서 말한다.
"이후에는 리타가 말했던 것처럼, 그 프로그램에서 인간 한 명분의 정신 데이터를 추출하고 추출한 데이터를 현실 세계의 존재에 주입하여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어야지."
마키스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미간이 좁아지며 그 왼쪽의 눈썹을 긁는다.
"현실 세계의 존재라면 로봇의 코드 아니면 생물의 정신인데, 생물의 정신은..."
"맞아, 불가능, 생물의 정신에 데이터를 삽입하는 기술은 현재로서 불가능하니까, 로봇에 코드를 삽입하는 쪽으로 생각해야겠지."
마키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책상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엘고의 모니터를 비스듬히 쳐다본다.
"그래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생물의 정신에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둬야겠지?"
"뭐, 미래의 인류가 기계이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마키스는 보기 싫은 미래를 상상해 낸 듯, 잠시 눈을 감는다.
'아아아아, 그럼... 생명공학과 관련된 것들은 인코이브 선생님을 만나 뵐 수밖에 없잖아.'
몇 가지 생각을 더 마친 마키스는 뭔가 결심한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좋아, 엘고, 지금 진행 중인 팀 파렐의 모든 연구와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방금 네가 말한 방법으로 새 프로젝트를 진행해야겠어. 새 프로젝트 이름은... 아이."
"아이? 어린 아이, 그런 의미야?"
"그것도 좋네, 사실 그냥 아담과 이브에서 따왔어, 이런 거는 바로 떠오르는 걸로 해야 돼. 그럼, 당장 제작에 돌입하자. 아까 우리가 말했던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지."
"혹시, 팀 파렐을 제외한 다른 모든 AI가 다 달라붙어서 하면?"
"잠시만... 약 27개월 9일."
"아, 타임 오버네."
"그리고 애초에 다른 모든 AI까지 작동시키면, 도시 전체가 정전돼 버릴 거야."
"역시 버겁구나. 그럼, 팀 파렐 전원이 만들면?"
"잠시만... 약 4개월 17일."
"오, 세이프!"
새로운 희망으로 마키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면, 우리 6기 중 하나라도 빠지면 10개월 넘어간다."
팀 파렐은 물리적 신체가 없는 AI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모니터와 스피커 출력을 통해서 표현하지 않을 때는 인간인 마키스로서 어떤 상태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팀 파렐은 마키스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자신들의 상태를 알려주곤 한다.
"어떻게 할 거야? 저기 알비는 정신없이 가동 중이고, 프롭이랑 홈은 지하 도시에 대해 계산하고 있네, 리타랑 레타도 유전자 조작에 대해 연구 중이고..."
"음... 쟤네들은 지금 진행 중인 연구를 끝마치는데, 얼마 정도 걸릴까?"
"하루? 이틀? 뭐, 금방 하겠지, 쟤네 하는 것들 끝내고 바로 돌입하게?"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지금 우리가 감마선 폭발에 대해 연구 중인 이유는 유의미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잖아.
"왜 막연해?"
"텔레스트 형이 말했던 대로 이번 재앙은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현재 우리 인류가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뭔가 하긴 하겠지만, 다가올 종말을 앞두고 받아들이게 될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 대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는 없다는 말이지."
"너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 관심이 없구나."
"아까 프롭이 말한 거 못 들었어? 그거 다 위선이야, 몇 년의 시간만 흘러도 바람에 모래 날리듯 사라질 목숨들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
엘고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만일 운 좋게 훌륭한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치더라도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토파이오의 현실적인 도움이 필수불가결해. 텔레스트 형이 말했듯이 감마선 폭발에 대한 정보를 누구와도 공유할 생각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토파이오에 알리고 구상해 놓은 적절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것을 염두하고 있었어."
마키스는 팔짱을 낀 채,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그런데 프로젝트 아이를 실행하기로 결정한 지금, 다른 연구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 게, 어차피 나는 연맹에 계획을 제출할 때, 제출한 계획이 완수될 때까지 그 계획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AI를 한 기 이상을 같이 보내야 해."
엘고가 프로젝트 아이의 브리핑을 준비하면서 대답한다.
"그치, 예전에 내가 갔던 것처럼, 근데 AI를 보낸다 해도 어차피 여기서 구동하고 네트워크 연결로 전달하는 거니까, 예전에 해봤던 것처럼 두 가지 임무를 병행하면 안 돼?"
"안돼, 연맹 쪽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연맹 쪽에서도 연결된 AI의 모든 정보에 대해 접근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두 가지 임무를 병행했을 때, 프로젝트 아이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 보고하지 않은 임무를 진행하다가 적발됐을 때, 적절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네마 자격을 박탈당하고 범죄자가 될 거야."
"우리 팀 파렐 이외의 AI 중 아무나 보내면 안 돼?"
"토파이오는 너희 이외의 AI는 취급도 안 해... 매번 백업, 초기화해서 보낼 수도 없고."
"웬만하면 초기화는 피하고 싶네, 다시 말하지만, 그거 되게 불쾌하고... 힘들거든."
"알고 있어, 오류가 생길 가능성도 있고, 그럴 일은 없도록 할게."
"음... 그럼, 아예 프로젝트 아이를 미리 말하는 거는... 안되겠지?"
마키스가 오른손을 휘저으며 헛웃음을 짓는다.
"당연하지, 프로젝트 아이를 알게 되면 토파이오는 나를... 인류를 배신한 미치광이 범죄자라고 낙인을 찍을 거야.
엘고도 헛웃음을 짓는 것 같다.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네."
"아무튼 상황이 바뀌었어, 범법의 길로 들어설 것을 선택한 이상, 국제 연맹과의 연계는 완전히 포기해야지."
한숨을 푹 내쉬는 마키스.
"사실, 조금은 믿고 있었거든, 토파이오의 힘을. 지금까지 내가 토파이오에 협력해 온 이유는 매번 감사하게 여길 만큼의 엄청난 지원을 우리 연구소에 해준 덕분에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문명의 발전을 실현시켜줬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인 이유로, 나는 그들의 전력, 강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토파이오는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의 막강한 파워를 지닌 집단이기 때문에 굳이 반항 없이 협력해 온 거지. 최고로 맛있는 당근과 최고로 아픈 채찍을 갖고 있는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우리가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완전무결한 강자라고 믿었던 존재가 무력한 약자로 바뀌는 것을 볼 때의 그 기분은 참 미묘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류 중 가장 강한 집단인 토파이오의 전력을 아는 내가 생각해 봐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봐도 이번 재앙에 의미 있는 수준의 대응을 할 능력은 없다는 거야."
특히 새로운 강자의 출현이 그 이유라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토파이오가 감마선 폭발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즉각적으로 반응할 텐데, 우리보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진상에 대해 파악할 것이고 결국, 지하 도시든 유전자 조작을 통한 신인류 창조든 뭐든 나름의 대응을 시작할 거야.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빠르게 인류의 최선책을 찾아내는 것이 역할인 내게, 우리 아르티아 연구소에 아닌 척하면서 강압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그런 결정들에 대해 토파이오는 정답을 찾은 거라고 생각하겠지."
마키스는 엘고가 띄워져 있는 모니터 안의 렌즈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틀렸어, 적어도 내게는... 그런 식으로 토파이오에 협력하게 된다면, 프로젝트 아이의 진행은 더뎌지게 될 테고, 결국 완수하지 못하게 될 거야. 틀린 계획 때문에 옳은 계획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어. 재앙 이후 재건에 들일 노력과 비용을 계산하면 난 당연히 프로젝트 아이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내 의지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