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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조용히 듣고 있던 알비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조용히 말을 꺼낸다.
"마키스, 지금 네가 한 말이 인류를 저버리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내 말이 맞아?"
"저버린다, 보다는..."
마키스는 적절히 돌려 말할 단어를 떠올려 보려 하지만, 마땅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맞아, 인류와 문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문명을 택할 거야."
마키스를 오래 봐 온 알비였지만, 그럼에도 꽤 충격을 받은 듯하다.
"너..."
한편, 이 말을 홈이 직접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알비다.
"우리가 지금 인류를 가까워지는 종말에서 벗어나게 하고 존속시키려는 이유는, 인류가 모든 생물 중 가장 가치 있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그 연속성을 포기하고 완전히 대체 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면 현 인류의 가치는 가축보다 떨어질 거야."
알비는 객관적으로 주장을 펼쳐봤지만, 눈을 비비며 의자에서 일어난 마키스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나도 당연히 역사를 이어 나가는 주체가 우리 인류이길 바래... 하지만, 이제야 알겠어. 내가 바라는 가장 소중한 것은 네가 방금 말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연속성, 문명 그 자체였어."
"그 문명을 이어온 인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으니 버리겠다?"
처음이다, 알비가 자신의 감정을 마키스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그... 렇지, 지금 상황이 어려운 만큼 더 이상 소모적으로 집착하는 것보다는, 그 연속성을 이어 나가는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된 것 같아. 이런 중요한 문제를 나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인류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껏 그래왔고 그게 늘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까..."
방금 상당히 오만한 말을 듣게 되었지만,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마키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전력으로 시뮬레이팅하며 계산했음에도 여전히 지워낼 수 없는 짙은 절망이 나도 두려워.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역사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주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잖아? 도마뱀 꼬리를 잘라내듯, 쉽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는 마키스를 본 알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던 일을 끝내러 시뮬레이션으로 돌아갔다.
마키스는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엘고, 브리핑 같이 준비하자."
마키스는 엘고와 몇 시간의 회의를 거친 후, 팀 파렐을 불렀다.
"다들 현재 진행 중인 모든 것을 멈추고 주목해 줘."
팀 파렐 전원은 하고 있던 모든 행동을 멈추고 카메라를 통해 마키스에게 주목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진행할 프로젝트 아이에 대해서 설명할게. 필요한 것은 크게 5가지야.
첫 번째는 너희가 만들어 줘야 할,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 말 그대로 인류의 패턴을 완벽하게 복제한 데이터 형태의 프로그램이고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 엘고가 설명해 줄 거야.
두 번째는 그 프로그램을 관리하며, 이후에 프로그램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고 현실 세계의 존재에게 전송해 줄 관리자 AI. 이건 내가 만들 거야.
세 번째는 관리자 AI가 프로그램에서 추출한 데이터를 전송받아, 현실 세계에서 활동하게 해 줄 매개체 역할의 로봇.
네 번째는 현 인류의 DNA를 이어받은 미래 인류의 씨앗, 냉동된 정자와 난자.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내고, 지구의 환경이 심각하게 급변해도 버텨낼 수 있는 안전한 벙커."
갑자기 리타가 훅 들어온다.
"잠.깐.만. 마키스, 이거 내 아이디어잖아! 아까는 무시해 놓고... 빨리 고맙다고 해!"
"미안, 그때는 내가 정신이 없었어, 땡큐, 리타!"
리타는 아이 같아서 다루기 어려우면서도 쉽다.
"헤헤헤, 오케이!"
기분이 좋아진 리타는 그제야 엘고가 준비해 놓은 브리핑 모니터를 확인한다.
"그런데,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 이게 뭐야?"
"마침 잘 물어봤어. 이후에 엘고가 따로 설명하긴 할 텐데... 뭐, 워낙 중요한 거니까 미리 조금 설명해 둘게. 다들 잘 들어줘."
사실, AI끼리는 이 정도 데이터를 주고받는 데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이 브리핑이 왜 필요한가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이 브리핑이 진행되는 이유는 인간인 마키스가 AI인 팀 파렐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의견을 주고 받으며 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브리핑이 끝나면 팀 파렐끼리는 회의 정보를 동기화하여 전부 공유한다.
"너희가 만들 프로그램은 크게 능동적인 액티브 데이터와 수동적인 패시브 데이터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쉽게 말해서 데이터상의 생물과 무생물이야. 패시브 데이터는 데이터로만 존재하며 의지가 없기 때문에 타 데이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고, 액티브 데이터는 스스로 데이터임과 동시에 다른 모든 데이터에게 자신의 의지로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사실, 그 의지라는 것도 자유의지랑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일단 이렇게 나눌게.
액티브 데이터와 패시브 데이터는 서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아. 발견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편한데 예를 들어, 인간이 불을 최초로 발견하고 다뤄내기 이전부터 불이 생성될 수 있는 데이터는 이미 존재했어. 이 과정을 크게 보면 인간이라는 액티브 데이터가 자연이라는 기존의 패시브 데이터에서 불이라는 새로운 패시브 데이터를 발견, 즉 창조해 냈다고 볼 수 있어.
기존 데이터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발전시키며 파생되는 고차원의 데이터를 발견해 나아가는 이 과정들을 담은 것이 너희가 제작해야 할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이야. 즉, 인류를 데이터상 생물의 형태로 제작할 것. 베이스로 집어넣을 현존하는 모든 데이터가 패시브 데이터가 되겠고, 완벽하게 복사해 낼 인류의 패턴이 유일한 액티브 데이터가 되겠지."
"오, 뭔지 알 것 같아, 느낌 있어!"
리타가 프로젝트 아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니, 마키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렌즈를 기분 좋게 가르킨다.
"잠깐, 그러면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들은 액티브 데이터야? 아니면 패시브 데이터야?"
마키스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대답한다.
"처음에는 액티브 데이터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 문제가 늘어나는데 먼저, 같은 데이터라도 액티브 데이터로 활성화했을 때가 패시브 데이터로 활성화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용량을 차지해. 그리고 무엇보다 액티브 데이터로 할 필요가 없더라고. 우리가 담아내고자 하는 세계는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게 생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이 낮다고 판단됐어. 그래서 그냥 패시브 데이터로써 활성화하면 돼."
"아하, 오케이!"
"이어서 계속 브리핑할게. 로봇과 냉동 정자와 난자 등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구안해 놓은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진행 방식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게.
먼저, 인류가 보유한 모든 데이터로 만들어질 패시브 데이터와 인류의 모든 행동 패턴을 학습한 액티브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것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문명 자체를 복사하는 방식으로 계승시킬 거야. 그렇게 문명은 프로그램에 담긴 채, 가상 세계로 안전하게 대피하고..."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리타가 호탕하게 한 번 더 훅 들어온다.
"굳이 인류와 인간이 미래 지성체의 청사진이 될 필요가 있나 싶어, 기왕이면 인간보다 유용하고 합리적인 존재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일 거야. 마키스가 우리들을 만든 것처럼. 하하하."
듣다 못 한 알비가 리타의 발언권과 소비 전력을 줄였고, 마키스는 리타의 카메라를 가볍게 째려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약 10개월 뒤의 감마선 폭발과 그로부터 약 4년 9개월 뒤에 한 번 더 올 감마선 폭발의 여파까지 지나 보내고, 안전하게 2년 5개월의 시간차를 둔 약 8년 후부터, 지상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우리 연구소 1층에 준비해 놓을 인공지능 로봇 선발대가 지상 복구를 시작할 거야.
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은 전력 공급망을 확보할 것, 그리고 주변 환경과 잔해물들을 이용해 로봇 생산 공장을 건설할 것. 준비해 놓을 선발대의 20기의 로봇은 자율적으로 로봇 공장을 건설할 거고, 계획대로라면 건설된 공장을 통해 약 2년 내로 800기 이상의 로봇으로 증식시킬 수 있어.
그리고 800기 이상이 되면, 이들은 본격적으로 도시 건설에 착수하게 될 것이고, 약 5년 내로 인간 40,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와 그 도시를 관리할 5,000기 이상의 인공지능 로봇을 확보할 수 있을 거야."
알비는 엘고가 준비한 시각 자료 모니터에서 마키스로 렌즈 방향을 돌리며 그에게 질문한다.
"그럼, 총 15년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쩌면 아까 자신의 의견이 부정당해서 언짢았던 기분이 이제는 괜찮아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응, 15년."
마키스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듯,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8년을 기다린 후에 7년 동안 도시 하나에 로봇 5,000기 제작, 큰 프로젝트네."
마키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약 15년이 소요되고 지구의 환경이 진정되어 갈 때쯤, 관리자 AI의 분석으로 현실 세계의 환경이 인간이 살아가기 적합한 환경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되면, 냉동 정자와 난자를 통해서 그곳에 새로운 인류로 번식시킬 계획이고, 이들이 스스로 주체성을 띠며 새로운 인류로서 자리를 잡게 되면,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에서 추출한 데이터형 인간을 몇 명씩 로봇에 삽입시킬 거야."
인류와 인간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인지 홈이 묻는다.
"'데이터형'이라는 것은 결국 진짜 인류와 인간은 아니라고 봐야 하는 거지?"
현 인류를 완전히 제외해 버린 프로젝트 아이에 대해 놀라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알비가 미리 설명을 잘해준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정의하는 인류와 인간과는 같다고 볼 수 없겠지만, 인류와 인간의 새로운 정의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우리에게 있어서 그들은 가짜지만, 미래의 새로운 진짜가 될 존재들이야."
홈은 조금 혼란스러워 보인다.
"내 계획대로라면 가상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던 그들은 로봇의 형태로 현실 세계에 깨어나게 될 테고, 당연히 여러모로 혼란스러워할 거야. 경계심이 강할 초기에 얼마만큼 잘 설명하고 전달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 따라서 때가 되면 관리자 AI가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데이터를 만들어 프로그램 내로 삽입할 거야."
프롭이 질문한다.
"여유 있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미리 넣으면 안 돼?"
"안돼,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세계가 가짜라는 생각을 들게 하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야. 그들이 현실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뒤에 설명을 해야 프로그램의 인류가 받게 될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킬 수 있어.
얼마나 걸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어지면 차차 현실 세계로 불러들이고 같이 살아가는 거야. 이렇게 해서, 감마선 폭발 후의 내가 그리는 미래의 새로운 시작은 정신적으로 문명을 계승 받은 가상 세계의 프로그램 인류와 생물학적으로 DNA를 계승 받은 현실 세계의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거야.
그 뒤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어.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오답은 없다고 생각해. 어쩌면 엄청난 혼란이 있을 수도 있고,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고, 모든 게 망가져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감마선 폭발 같은 어이없는 이유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하던 말을 멈추더니 잠시 상상에 빠진 마키스.
"어쩌면, 가상 세계 인류의 도움으로 현실 세계의 인류가 빠르게 문명을 전수받고 발전해서, 언젠가 다시 네트워크가 등장하고 인터넷이 생기면서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두 인류가 서로 도우며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도 있을 테고."
즐거운 상상에 만족했는지 마키스가 실실거리며 웃음을 짓는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플랜 B고, 플랜 A는 추출한 인간 데이터를 현실 세계의 로봇이 아닌 인간의 정신에 직접 삽입한다는 부분만 다른데. 이 부분은 생명공학 기술과 연관이 크니, 인코이브 선생님을 직접 만나 봬서 최종적으로 확인해 볼게. 어차피 냉동 정자와 난자 때문에라도 에투인 연구소에 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마키스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팀 파렐이 만들어 낸 침묵에 대해 대답한다.
"맞아, 너희들도 알다시피 데이터를 생물의 정신에 직접 옮기는 것은 터무니없이 어려운 것이라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을 거야. 아니면..."
하던 말을 멈추더니 이번에는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면 그 정도는 다음 세대에 넘기자고, 지금 기술로 불가능하더라도 미래에 두 인류가 만들어 가는 문명이라면 기술을 더 발전시켜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바꿀 수 있을 거야.
뭐, 당장은 너희들이 제작할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이 프로젝트 아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니,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