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마라면 보편적으로 토파이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최대한 받아내기 때문에, 마키스와 같은 특이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그들의 연구소는 대부분 규모가 크다.
그걸 감안하고도 에투인 연구소의 규모는 엄청났다. 마키스는 하나의 작은 도시 같은 이곳에 올 때면, 저 나이 많은 노인이 길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뇌도 젊어지는 건가?'
이 넓은 부지 전부가 본픽시오의 에투인 연구소고 이곳에 크고 작은 건물이 스무 개가 넘는데, 현재 마키스가 있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제1호 연구소다.
대부분의 연구소 규정이 그러하듯, 에투인 연구소를 출입할 때도 보안상의 이유로 위험품목 및 전자기기를 모두 제출해야 한다. 마키스 역시 스마트폰을 비롯한 스마트워치, 블루투스 이어폰 등 모든 기기를 제출했기 때문에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벽시계는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시계는 경호원의 손목시계.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저... 이제 몇 분 지났나요?"
경호원은 재촉하는 눈빛으로 압박하긴 했지만,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알려주긴 했다.
"흐음, 31분 지났습니다."
5층에서 최대한 버틸 생각인 마키스는, 본픽시오가 샤워하는 데 걸릴 시간을 예측했고, 약 4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원통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이동했다. 17층에 내린 마키스의 앞에는 한눈에 담지 못할 정도로 넓고도, 휴토상 시상식장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가득 찬 라운지가 보인다.
휴토상 시상식장과의 공통점이라면 이곳에도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차이점이라면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테리어 목적으로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테리어 목적으로 배치된 사람들은 인간 농장에 지내는 실험용 인간 중 일부를 데려온 것이다.
그들의 머리에는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제각각 다른 디자인의 화려한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옷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고, 몸에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반짝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제각각의 자세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이 넓은 공간 가운데에 비교적 조그만 원통형 방이 하나 있었고, 'наслаждать(즐겁게 하다.)'라고 쓰여있는 네온사인이 원통형 벽면을 따라, 감아 내려가면서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사람 4명이 나온다. 이들은 인테리어 목적의 사람이 아닌, 접대 목적의 사람이다.
그들은 아주 차분하고, 아주 공손하고, 아주 세련되게, 천천히 허리를 숙여, 정성을 들인 인사와 함께 마키스에게 말을 건넨다.
"어서 오십시오. 원하시는 게 무엇이든, 언제든지 명령해 주십시오. 최고의 시간을 보내시길."
"아, 음... 넵."
이번에도 마키스는 벙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가장 가까운 소파를 찾아 뻣뻣하게 앉는다. 어딜 쳐다봐도 민망한 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마키스는 눈을 감고 있기로 한다. 마키스의 머릿속에는 '다시 나갈까'와 '조금 더 기다릴까'가 끝없이 교차된다.
시간이 좀 더 지난 후, 드디어 17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황금빛이 도는 흰 가운을 걸친 본픽시오가 왼손에는 샴페인 잔을 들고 마키스를 향해 여유 있게 걸어간다.
"기다리는 동안 좀 놀았어?"
마키스는 입을 꾹 닫은 채, 눈은 걸어오는 본픽시오의 발걸음을 좇는다.
"그런 것 같지는 않네."
마키스의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은 본픽시오는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 한 모금을 마신다.
"자네가 직접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내가 젊어지는 것을 보려고 온 것... 은 아닐 테고,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겠지. 자, 내 귀는 열려있으니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봐."
마키스는 감마선 폭발과 그로 인해 벌어질 재앙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본 목적을 뻔히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인류의 씨앗이 되어줄 냉동된 정자와 난자에 대해서도 일단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연습했던 대로, 차분하게.'
그리고 본픽시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그녀가 관심 가질 만한 내용으로 미리 생각해 놓았던, 데이터를 생물의 정신에 주입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묻기로 한다. 마키스는 팀 파렐을 통해서 이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른다, 이 미친 과학자라면.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프로젝트 아이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주요한 기술 중 하나가 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데이터를 인간의 정신에 주입하는 것, 즉 가상 세계의 존재가 현실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의견을 여쭤보고 싶어 찾아뵙게 됐습니다."
본픽시오는 고개를 살짝 꺾어 마키스를 비틀어서 쳐다본다.
"왜, 엘고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은 건가?"
의도했던 것보다는 좀 더, 목적에서 벗어난 대화의 시작이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다. 마키스는 진심을 들킨 것처럼 행동하며 대화를 이어가기로 한다.
"..."
"엘고, 그녀는 완벽하지...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자네의 팀 파렐에 대해 관심이 무척이나 많아. 그런데, 이전에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랑은 온도 차이가 확실히 있네. 우리 마키스, 도대체 무슨 변덕일까..."
본픽시오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어간다.
"아... 잊고 지냈었는데, 다 기억났어, 2년 반... 정도 전쯤인가, 그래, 여름. 그, 내가 자네 연구실에 직접 찾아갔던 날 말이야."
마키스는 잘못 건드렸다 싶어 하며 받게 될 충격에 대비한다.
"그때, 나는 실험용 인간을 양산하는 것에 있어서, 모든 인간 하나하나를 직접적으로 교육해 줘야 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았었지. 뭐,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을 키워낸다는 것은... 그 육체를 키워내는 것에 비해서, 질려버릴 정도로 복잡하고 귀찮거든. 그래서 나는 그냥, 교육된 데이터를 생물의 정신에 박아버리고 싶었어. 그래서 자네를 찾아갔던 것이고, 자네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의뢰를 했었지... 그래서 자네 대답이 어땠나?"
"...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팀 파렐의 결과값이 불가능이었기에, 확고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마키스는 본픽시오의 눈을 피하고, 본픽시오의 시선은 마키스의 눈빛을 좇는다.
"아니지, 아니지... 자네는 나랑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야. 자네도 저 밖에 있는 어쭙잖은 머저리들이랑 똑같이, 그저 내가 인간들을 죽이고 키워내는 게 역겨웠던 거야. 그게 인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가늠도 못 하는 주제에... 그래서 자네의 대답이 불가능이었던 거야."
분노로 얼굴을 찡그린 본픽시오의 미간 주름이 파르르 떨린다.
"자네, 그거 아는가? 제정신이면 제정신인 것들밖에 느낄 수 없어. 정신이 나가봐야, 정신이 나간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야."
마키스가 호기롭게 받아친다.
"대신... 제정신인 것들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요?"
본픽시오가 책상 위에 올려놨던 샴페인 잔을 모두 비운다.
"그러니까, 절반만... 정신이 나가야지. 세상에는 제정신인 것보다, 정신 나간 것들이 훨씬 많아. 나도 그중 하나가 돼버렸지만..."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본픽시오가, 마키스를 더 긴장하게 했다. 본픽시오는 그런 마키스를 보더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다.
"하아... 뭐, 다 지난 일 곱씹어 봤자 뭐 하겠나.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이제 와서 원하게 된 이유가 뭔가?"
마키스는 5초간 머리를 쥐어 짜내어 대답을 생각해 봤지만.
"그저... 탐구심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허술했던 자신의 대답에 실망했다. 잠깐의 정적 후, 본픽시오는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렇겠지. 탐구심이겠지..."
이어 옆에 메이드를 쳐다보며 혼잣말한다.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치?"
본픽시오가 책상 위의 샴페인 잔을 가리키자, 메이드 두 명이 아이스 버킷에서 샴페인 한 병을 꺼내 잔을 채운다.
"자네라면 내가 정신의 코드화에 대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알고 찾아온 거겠지. 그래서 자네 AI들의 예측 결과는 어떤가? 성공이라고 하던가? 그래서 찾아온 거야...?"
마키스는 본픽시오가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며 방금 처음 들었다. 말을 아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본픽시오는 새로 채워진 샴페인 한 모금을 마시고 옅은 미소를 뱉는다.
"아니지, 실패라고 했겠지, 왜냐하면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불가능하거든... 하지만 그 '현재 인류가 갖고 있는 기술'에 내 기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윤리적 문제에 발목이 붙잡혀 있는 다른 바보들과는 달리, 내 기술은 인류의 수준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니. 자네는 내 기술과 데이터에 대해 예측할 수는 있어도 접근할 수 없으니, 사실을 알 수가 없겠지. 그래서 찾아온 거고."
마키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스."
편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있던 본픽시오는 자세를 낮춰 마키스를 향해 공격적으로 머리를 뺀다. 보인다, 눈 앞에 있는 저 괴물도 분명히 보이지만, 흰 가운 사이로 뭔가가 보인다. 공존하기 어려운 둘 이상의 감정이 머리와 심장에 각각 자리를 잡는다.
"자네 이외에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 에투인 연구소에 직접 오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고 있나?"
마키스는 천천히 왼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최상위 네마 중 하나이니, 그 칭호에 따라오는 막강한 권한과 절대적인 자유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토파이오에게 걸맞은 성과만 제출한다면, 말 그대로 뭐든지 할 수 있지."
본픽시오는 모든 것이 자신의 손 안에 있고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듯, 왼손의 샴페인 잔을 가볍게 휘젓는다.
"네마 중에서도 나 처럼 대체 불가능할 주요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오고, 앞으로도 낼 잠재력이 높은 경우라면... 조그만 마을 하나 정도는 만들거나 없애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거든. 지금 자네가 앉고 있는 자리에 앉았던 인간들 중, 자신의 의지로 이곳을 나간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아..."
본픽시오는 소름 끼쳐 하는 마키스를 보더니 웃는다.
"하하하, 장난이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자네를 건드는 것은 어렵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자네를 꽤 아끼고 있어, 여기 이렇게 날 보러 찾아와 주지 않았나. 여기에 제 발로 오는 인간이 하도 없다 보니, 자네에게 애착이 가서 농담 좀 해 봤어."
본픽시오가 다시 편하게 등을 기대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자, 메이드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보며 무전기에 대고 속삭인다. 이후 인테리어 목적으로 가만히 서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메이드의 명령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하더니, 본픽시오 다리 앞에 웅크리고, 그 위에 본픽시오의 다리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