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네마 Nema / No.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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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D

'좋은 날씨다.'

다음 날,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마키스는 1층 카페의 외부 발코니에 자리를 잡아 앉고, 화창하고 선선한 오늘의 날씨와 함께 커피를 음미한다. 그런데 너무 짧았다. 가장 큰 사이즈로 주문했건만, 몇 번 빨아들이더니 커피잔은 바닥을 보인다.

'역시 프라푸치노를 마실 걸 그랬어.'

오랜만에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는데, 커피 줄어드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항상 이런 식이다. 더 이상 빨대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쯤 '벌써 다 마셨나.' 하면서 컵을 쳐다보면, 커피 대신에 '다시 써도 될 것 같은데.' 싶을 정도로 멀쩡히 버텨낸 얼음이랑 어색하게 눈이 맞는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 듯한 얼음의 저 투명함이 더 얄밉게 느껴진다.

'내가 주문한 것은 커피. 커피 반, 얼음 반이 아니라고.' 라는 생각을 뇌 속에서만 조용히 중얼중얼,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매번 손해를 느끼는 마키스였다.

마키스가 프라푸치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얼음을 포함한 커피와 우유 등의 모든 재료가 전부 믹서기로 갈려 하나로 나오기 때문에, 얼음이 보이지 않는 프라푸치노를 앞에 두고 나서야 온전한 '커피'를 받았다는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 주문한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한모금 쭉 들이키더니 만족하는 마키스.

'응, 역시 프라푸치노.'

그건 그렇고, 프라푸치노를 마실 걸 그랬다니, 참으로 평화로운 후회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전까지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었다.

전쟁, 혼란, 붕괴된 사회 속에서는 그저 살아남을 뿐, 살아간다는 사치는 누릴 수 없었는데, 이를테면 지금처럼 카페 안에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도 없었고, '누군가 도끼로 내 뒤통수를 찍을 것 같은데' 라는 걱정도 안 할 수가 없었다.

31살인 마키스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시작되었던 전쟁, 아니,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혼란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혼란은 마키스를 비롯한 전 인류에게 깊은 상처를 새겼고, 그 상처의 통증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33년 전의 악몽은 이렇게 시작했다.

"어제를 잊은 자는 내일을 바라볼 자격 없이, 오늘에 갇혀 마땅하기 때문에..."

책상 앞의 남자는 작성된 연설문을 넘겨 읽으며 문장을 되뇐다. 공기가 멈춘 것처럼 날 선 분위기가 감도는 집무실, 호흡조차 쉽지 않다. 역사의 중대사를 앞두고 분명 마음을 단단히 굳혔을 터, 하지만 예상보다 더 컸던 불안은 남자의 정신을 무겁게 짓누른다.

결국, 압박은 남자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고, 그 반동으로 창문 앞까지 이끌린 남자는 공기를 음미해 본다.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아침의 공기가 이전과는 달랐다. 따스했던 태양 빛은 뜨겁게 타올랐고 시원했던 바람은 차갑게 식었다.

시대가 변하고 강함의 척도가 달라지면서, 초강대국 반열에서 언제 밀릴지 모르기에,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벌어져가는 적국과의 격차는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기에, 공포로 지배하는 국가 체제의 말로가 느껴지기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위대한 과거의 지도자 사진들을 올려다봤다.

'결국은...'

고귀한 역사는 걸음에 맞춰 국가의 광휘를 이어가야만 한다며 계속해서 남자의 등을 떠밀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잔인한 법,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세계는 잘못된 형태로 평화 위에 자리를 굳혀가는데, 국가의 은혜를 잊어버렸는지 대부분의 솔정들조차 전쟁과 긴장감에 지쳐있는 상태다.

남자는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내쉬며 불안을 조금씩 덜어내 본다. 연설 준비를 마치고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확인한 남자는 선조가 남긴 기대와 영광을 등에 업고, 단상 위로 올라가 렌즈를 바라보며 온 국민을 향해 계몽을 시작한다.

"우리는 배곯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방관해 오지 않았습니다. 약자를 보호해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교육을 통해 어둠 속에 갇힌 눈을 뜨게 하였으며, 올바른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 왔습니다."

잠깐의 침묵과 함께, 미간의 주름과 목소리의 호소력이 짙어진다.

"하지만 지금 저 밖에, 우리가 쌓아 온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류를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자들과 그들에게서 더러운 돈을 받으며 괴뢰를 자청하는 자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퇴보를 거듭할 것이니, 우리의 찬란한 역사가 말해주듯, 이번에도 우리는 인류를 구원할 것입니다."

라며 사테파르(Satepar)의 독재자, 올리더스 크니콜(Olidus Cniqol)은 일부 솔정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문제를 빌미로 적국 알도르프(Aldeorp)를 향해 선전포고를 던졌다.

사테파르의 선전포고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알려졌고 소식을 접한 모든 이들은 이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국가 간의 전쟁이었던 만큼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다 같이 죽을 셈인가, 이 전쟁만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네."

두 초강대국 간의 전쟁은 필시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산될 것이 선명하여 끔찍한 참사를 막기 위해 알도르프의 리더, 드벨 에타르보아(Dveol Etarboa)는 사테파르를 향해 선전포고를 무를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전쟁은 분명히 혹독하지만, 도태되는 것만큼 가혹하진 않아."

하지만 드벨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올리더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에 전쟁을 피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드벨은 곧바로 군사 대비 태세에 돌입하였고, 신속하게 전쟁과 진압에 대한 모든 대비를 마친 알도르프였지만 먼저 공격을 시작하진 않았다.

역사 때문이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무엇이 참담한 전쟁의 시발점이 됐는지는 번복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알도르프는 선공보단 반격을 택했다.

언제 전쟁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순간,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시민들의 긴장은 점점 커져갔고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져 갔다. 전투기는 이미 상공에 비행 중이며 미사일의 발사대 설치가 완료되는 등 군사 태세가 마무리된 지금, 사테파르의 총알 한 발이면 모든 것이 시작된다.

1시간... 8시간... 25시간... 53시간...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감과 이상함이 묘하게 섞여 커져갔고, 알도르프의 작전 지휘실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군...'

사테파르를 주시하는 알도르프의 최전방에서는 결코 경계를 늦추진 않았지만, 사테파르의 공격이 이토록 전혀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선전포고 후 약 87시간 13분이 지날 때쯤이었다. 미사일도 총알도 아닌 통신 하나가 사테파르로부터 도착했는데, 이 통신은 알도르프의 최전방에서 최상부로 전달되었고 그 내용은 이러했다.

"사테파르는 내부 분열로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과 국가 체제가 무너진 상태이며, 사테파르의 국민들은 올리더스 크니콜의 의지에 강력히 반대하며 선전포고를 번복하고 항복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밝혔습니다."

민심 따위는 뒤로 둔 채, 올리더스와 그를 따르는 일부 솔정들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진행됐던 선전포고는 독재국가를 전복시킬 만큼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됐으며 결국, 전쟁에 반대하는 간부들과 대다수의 국민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올리더스를 끌어내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알도르프는 이 항복을 받아들였고 사테파르를 전범국이라 칭하기는 모호하여, 이미 반송장이 된 올리더스와 그와 관련된 인물 758명만이 전범자인 것으로 판결되면서 승전국도 패전국도 없이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한 위협은 끝났다.

"딸, 딸아이,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키, 키가 이 정도 되는 여자아이 못 보셨어요? 그러시지 마시고 제발 사진 한 번만 봐주세요."

하지만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혼란에 가려져 있던 상처가 드러나며 진통이 점점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물리적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극도의 불안과 긴장에 대한 후유증은 크게 남아있었다.

"엄마, 아빠, 어이야? 우리 엄마아빠 어이써요?"

전 세계의 약 80% 이상의 국가는 세계 대전을 예상하며 초비상사태였고, 각국의 시민들은 대피하거나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주가는 폭락하고 사재기로 물품들은 사라졌었다.

"내놔! 그거 내가 갖고 있던 초콜릿이잖아, 이 도둑놈이!"

87시간은 인간의 존엄이 사라지고 그들이 숨겨왔던 짐승의 이빨을 드러내기 충분한 시간이었으며, 전쟁은 그저 인류를 들여다봤을 뿐이지만 문명의 상처는 깊었다.

"뭐라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서 회사고 주식이고 가정이고 모든 것을 다 때려치웠는데, 이제 와서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그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대다수의 시민은 전쟁을 압도적으로 부정하며 절대적인 평화를 지지했고 인류는 휴식과 재건에 힘을 쏟게 되었다.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 국제 우호 관계의 촉진과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인도적 문제에 관한 국제 협력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 평화 기구, 국제 연맹 토파이오를 창설합니다."

이렇게 제1대 토파이오 국제 연맹장인 레케인 에니아포(Raecane Eniapoe)의 발표와 함께 범세계적인 국제 연맹 시스템의 도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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