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 엘고, 알비, 프롭, 홈, 리타, 레타, 좋은 아침."
"여어, 마키스, 잘 잤어?"
"아니..."
마키스는 잘 때마다 매번 꿈을 꾸는데, 어제는 오랜만에 심한 악몽을 꾼 듯 하다. 잉태기를 받은 날, 마키스는 운송인이 떠난 뒤에 잠도 못 자고 고민을 했다. 태아기의 인간을 버리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아기를 키울까 생각해보니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아니면 아기를 토파이오의 구호소에 보낼까 했지만, 남은 몇 개월 동안 마음의 짐과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 같아서 이 또한 그만두었다. 노년기까지 키워 자연사를 하게 하는 것은 죽이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결국 자신의 앞가림은 할 수 있도록 성인기까지 키워내기로 했다. 그렇게 설정한 뒤 버튼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뒤늦게 든 생각.
'어, 정신 연령의 정도는 어떻게 결정되는 거지?'
마키스는 곧바로 본픽시오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연결음)
'아아, 선생님, 제발 받아주세요...'
마침 인체 실험 도중이 아니었는지 다행히도 본픽시오는 전화를 바로 받았다.
"어, 마키스, 나야, 왜?"
마키스는 안도의 한숨을 살며시 내쉰다.
"오, 선생님, 후우"
"어제 제품을 수령받는 날이었지. 뭐, 제품에 문제라도 있어?"
"아뇨, 아뇨, 보내주신 모든 제품은 제대로 잘 받았습니다만, 사용 방법에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말해."
"신체 발육 정도는 조절했는데, 정신 발육 정도는 어떻게 조절합니까?"
"그런 거 없어, 그야 당연히 직접 키워야지."
"직접 키워요?"
"내가 그거 하기 싫어서 지금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거 아니겠냐."
"원래 이런 거라고요? 거짓말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불만 없답니까?"
"내 고객들은 보통 정신을 키우는 것에 관심 없어, 그저 육체를 키우고 사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아."
"뭐,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진 것 같네, 아주 보기 좋아."
마키스는 뜨끔했다.
"그... 러면, 가장 키우기 쉬운 신체 나이를 추천해 주시면 몇 살입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청소년기가 쉬울 것 같네.
어차피 정신은 비어 있는 상태니까, 쓸데없이 몸집이 큰 것에 비해서는 다루기 쉽겠지, 그렇다고 너무 어리면 별것도 아닌 걸로 죽어버려서 13살에서 18살이 키우기 좋을 거야."
마키스는 두통이 다시 도졌는지,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태어난 뒤에 예방 접종이나 이런 것들은 따로 가서 받아야 하죠?"
"아니, 내 일반 인간 수정란 캡슐은 사용자 편의에 최적화 되도록 만들어서, 대부분의 질병에는 면역력을 갖도록 미리 유전자 조작을 해뒀어."
"그건... 좋네요."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머리 속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생각을, 안될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져보는 마키스.
"혹시... 선생님께서 키워,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이후에 본픽시오가 만들어낸 차가운 침묵에 마키스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며 두 눈을 찡그린다.
"진심이야? 마키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타인에게 떠넘기지는 마."
"넵, 죄송합니다."
"그래, 더 궁금하거나 할 말 있어?"
"아뇨..."
"그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전화하고, 그럼, 빠이."
"네에."
'그러니까 말투는 왜 젊어지는 거냐고.'
다시 잉태기 앞으로 돌아온 마키스는 13세의 기본값으로 설정한 뒤, 출하 코드를 입력한다. 완료까지 남은 시간 1시간 46분. 마키스는 여전히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잉태기 앞의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났고 기계 알림음이 들린다. 떨리는 마음으로 잉태기의 강화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확인했는데, 대략 155cm의 아담한 체형에 검정색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헝클어진 채 상체를 뒤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와 휘감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의자에 털썩 앉은 마키스. 이후, 전용 양수가 빠지고 세척 및 건조, 안정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키스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야속한 잉태기를 노려본다. 그러든 말든 잉태기는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기계 작동음이 멈추고 1번 개폐문이 열렸다. 그렇게 어느 한 동양인의 소녀가 태어났다.
마키스는 오만 가지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부축해 주러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번쩍하며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잉태기 위에 앉았다. 그녀가 오른쪽을 바라보자, 마키스와 눈이 맞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기 시작한다. 한껏 웃다가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 곧바로 잉태기 아래로 내려오려하는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잉태기의 높이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고통에 이번엔 한껏 울기 시작한다.
마키스는 그녀를 달래주려 했지만,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는 몰랐기에 우물쭈물한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금방 울음을 그친 소녀는 연구실 내부가 신기한지 아기처럼 바닥을 기어다니며 탐험한다. 한동안 청소도 제대로 하지 못 해서 연구실 바닥은 지저분했고 뾰족하거나 위험한 전자제품들이 많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행동을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도저히 맨살을 잡기는 부끄러웠는지, 일단 활동하기 편한 자신의 츄리닝을 꺼내, 소녀의 몸에 덧대어 펜으로 길이를 표시하고, 표시한 선에 맞게 가위로 잘라 소녀에게 입힌다. 그리고 가위를 든 김에 계속 불편해하는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도 조금 잘라내어 긴 머리카락으로 바꿔준다.
'옷부터 빨리 사 와야겠네.'
그리고 렌즈를 쳐다보며 모든 교육을 전적으로 엘고에게 맡기려 한다.
"엘고, 잘 부탁한다."
모니터에 나타난 엘고.
"마키스, 나 데이터형 인류 프로그램 만들어야 하는데."
"완성 일자를 조금 미룰까?"
"마키스, 나는 물리적으로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어서 아이를 교육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데."
소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펜을 집더니 엘고가 띄워져 있는 모니터로 던진다.
"이것 봐."
책임을 미루려던 마키스는 자신이 그녀를 교육하기로 한다.
"그래, 내가 맡는 게 맞겠지. 아, 먼저 이름을 지어줘야 되겠어, 엘고, 괜찮은 이름 추천해 줘."
엘고는 카메라로 소녀를 유심히 쳐다보며 분석한다.
검고 진한 긴 머리카락에 큰 눈이 특징인 아주 예쁜 아이였다.
"응, 정했어, 마키스."
"왜?"
"마키스."
"마키스? 나랑 똑같은 이름을 쓰라고?"
"마키스!"
'?'
"마키스! 일어나!"
마키스는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앞에는 잉태기가 있었다. 그제야 잉태기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고민하다가 잠든 자신을 기억해 낸다. 그런데 잉태기를 보아하니 내부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너 그러다가 병나, 뭐 좀 먹고 좀 자라."
"엘고, 어떻게 된 거야? 왜 내부가 비어 있어?"
"흠..."
고민하다가 잠들어버린 사이에 최대 보류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9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이미 자동으로 폐기가 돼버린 것이다.
"엘고, 왜 안 깨웠어!"
"깨웠으면 이 인간을 키워냈을 거잖아?"
마키스는 아무 말 없이 살인자를 보듯 렌즈를 바라보며 책임을 넘기려 한다.
"그렇다면?"
"이제 곧 종말할 세상에 새 생명을 불러들이는 게 옳은 것 같지는 않았어, 무엇보다 프로젝트 아이에 있어서 방해가 되면 됐지, 득 볼 일은 없다고 판단했어."
마키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잉태기 내부를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하아, 엘고..."
사실 엘고의 말은 옳았고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랄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결단을 내려준 엘고에게 내심 고맙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래... 2층으로 가자."
아르티아 연구소는 지하 8층으로 이루어진 직육면체 구조로, 각 층의 규모는 약 333㎡(100평)다. 지상과 지하를 연결해 주는 엘리베이터와 계단마저 사용되지 않을 때는 지하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아르티아 연구소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키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과시욕이라는 걸 갖고 있잖아?"
"대부분은 그렇지."
이 지하 벙커는 원래 전쟁과 재난 등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에어로크의 국가중앙통제실이었는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안전을 추구하는 마키스의 성향에 잘 맞았기에, 그는 네마가 되면서 연맹을 통해 국가에 요구하여 이 건축물을 받아냈고, 이를 개조하여 자신의 연구소로 사용 중이다.
"그런데 너는 왜 모든 것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뭐가?"
"다른 네마들처럼 연구소를 넓히거나 높이거나 늘리려고 한 적 있어? 없잖아. 넌 그냥 모든 것을 지하에 박아 넣고 모든 걸 숨기잖아."
국가가 소유한 지하 벙커들 중, 특히 가치가 높았던 이 시설은 내부에 2기의 SMR이 설치되어 있어서 모든 전력을 스스로 공급할 수 있으며, 여러 혹독한 환경에서도 멀쩡하게 버틸 수 있는 최고 등급의 안정성을 검증받았다.
"그건 말이야, 관측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가치가 있어. 관측되는 순간 사실로 확정되고, 사실로 확정되는 순간 판단이 가능해져. 상대가 나에 대한 판단이 가능해지면 장점과 약점을 비롯한 특징이 노출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가치가 정해진다는 뜻이야."
도심에 위치해 있어서 추가 전력을 끌어오기 수월하고 네트워크가 빠르며, 여타 편의시설에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마키스는 이곳을 선택했었고, 지금의 아르티아 연구소가 되었다. 현재는 지하 건축물인 아르티아 연구소 위로, 연구소 입구를 피해서 건축된 별개의 9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마키스가 자주 가는 카페도 이 건물의 1층에 있다.
"내가 숨거나 숨기는 이유는 내 가치의 한계를 두지 않기 위해서야."
"심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