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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데스크탑을 사용하면 양팔이 저리곤 한데, 지금이 딱 그렇다. 이럴 때는 소파에 뛰어들어 배가 위를 향하도록 눕고 양팔을 하늘로 들어 열심히 털어내면 조금 도움이 된다. 5분 정도 이렇게 하니, 왼팔의 저림은 조금 풀렸는데 오른팔은 조금 남아있다. 오른팔만 들고 팔을 흔들다 보니 예전에 에어로크 국제 프르소 육성 학원에서 선생님께 질문했을 때가 생각난다. 허, 이것도 벌써 20년 전의 일이 되어가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젊음에서 멀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토파이오는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어떠한 국제 연맹과도 궤를 달리하는 모든 국가의 합의 하에 창설된 초법적 최상위 기관입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초밥, 아니, 초법적이라는 게 뭐예요?"
"초법적이라는 것은 법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학생의 눈은 초롱초롱해졌다.
"그럼, 우리나라의 모든 법을 초월할 수 있는 건가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국가의 모든 법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던 다른 학생의 질문.
"선생님, 하지만 법은 중요한 거잖아요?"
"맞습니다, 법은 여전히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할 사회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평화를 가장 앞장서서 지켜내는 토파이오는 그 존재 자체가 법이자 법 이상의 질서이기 때문에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겁니다."
'와아, 법을 무시해도 된대, 나 무조건 토파이오에 들어갈 거야.'
학생들은 초법적이라는 의미에 매료되며 웅성거린다.
"자, 토파이오가 초법적 기관이긴 하나, 토파이오 내의 모든 관계자가 초법적 권한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최상위 등급인 네마와 1급 프르소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막중한 책임과 함께 특별한 권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웅성대는 소리가 잦아들고 다른 학생이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국가는 엄청 많잖아요? 어떻게 모든 국가의 합의를 얻을 수 있었던 거예요?"
"좋은 질문입니다, 국제 평화를 위해 창설된 토파이오에 가입하지 않는 국가가 있다면 어때 보일까요?"
"평화에 관심이 없어 보여요."
"그렇죠, 가입하지 않았던 국가는 국제 평화에 협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비난을 받게 됐답니다. 또한, 그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고립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참여 강제성이 높아졌고 결국, 한뜻으로 모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 칠판에 쓰여있는 '국제 평화' 부분을 지시봉으로 짚는다.
'생생하게 기억나네, 딱히 친한 얘들은 없었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마지막으로 동창회... 한 번쯤은 나가볼까.'
토파이오 창설 이후, 각국의 대표는 국제 연맹 회담에 참여하여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와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해서 담화를 나눴고, 회담 중 90% 이상의 찬성을 얻어낸 결의안은 인류가 공동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로 인식됐다.
문제 해결에 적극적일수록, 실제로 해결해 낸 성과가 많을수록 해당 국가는 연맹 내에서 발언권과 투표권과 같은 영향력 더 얻게 되었고, 전쟁이 없는 평화가 유지되는 만큼 국가 간의 경제 및 외교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경쟁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연맹이 나아가는 방향을 자국이 최대한 득리를 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토파이오 내에서 영향권을 얻으려는 경쟁은 상당히 중요했다.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 후, 초반의 몇몇 국가는 이러한 방식에 불만을 갖게 되며 협력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점차 시간이 흐르며 토파이오에 협력하는 것이 더욱 이익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토파이오 창설 후 약 4개월 만에 모든 국가는 토파이오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키스는 모든 국가가 통합된 토파이오를 동경하게 됐으며, 언젠가 네마가 되어 세상의 중심에서 인류를 이끌어갈 것을 꿈꿨었고,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휴토상과 국제 명예 훈장을 바라보며 영광의 순간을 다시 한번 더 머리 속에 담아본다. 마키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어느샌가 팔의 저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토파이오 조직 내에는 여러 다양한 직책이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네마와 프르소다.
결의안을 통해 정해진 문제를 풀어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각 국가에선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자와 노동자를 토파이오로 파견했고, 혹은 개인이 토파이오에 직접 지원하기도 했는데, 인류가 걸어온 길의 문제들을 고칠 각국에서 파견된 이들을 프르소[Prso(the Previous Solver)]라고 불렀다.
과거의 문제점을 인지하며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네마[Nema(the Next Maker)]는 인류 발전을 이끄는 선구자로서, 범인류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토파이오로부터 인정받은 인간을 일컫는 직책이자 칭호이며, 토파이오를 통해 직속으로 선발된다. 성과에 따라 상이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네마는 연맹과 소속 국가에서 최고위급의 대우를 받으며 연맹으로부터 무한에 가까운 지원을 받아, 연구와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기브 앤 테이크.
막대한 지원을 받는 만큼 연구를 통해 얻은 모든 성과 및 결과물은 연맹과 공유되어야 하며, 성과 및 결과물을 숨기거나 연맹 이외의 개인 및 단체에 유출하는 것은 심각한 연맹법 위반 사항이다. 연맹법은 조항 개수가 굉장히 적어서 제한하는 범위는 좁지만, 토파이오 내의 초법적 권한을 보유한 이들에게도 적용되는 특별한 법이다.
한번 네마가 되었다고 영원히 네마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지원된 풍족한 투자에 걸맞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격이 박탈되거나 프르소로 강등되기도 한다. 반대로 위대한 성과를 내어, 네마가 되기 위해 받았던 평가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평가 기준을 통과했을 때는 토파이오가 주최하는 휴토상을 수상받을 수 있는데, 마키스가 이번에 받은 상이 바로 이 휴토상이다.
토파이오와 네마, 프르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체제로 상대적 강대국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상대적 약소국은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 받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기에, 이 시스템은 인류 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줬다고 평가받게 됐다. 훌륭한 대접을 받는 프르소는 모든 사람의 꿈의 직업이, 존재 자체가 희귀한 네마는 지성인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상상해 보는 꿈 같은 직책이 되어갔다.
현재, 전 세계에 네마는 689명, 프르소는 약 4억 2,180만 명, 각국에 연맹 거점이 있는 토파이오의 영향권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런 네마와 프르소를 인구수 대비 가장 높은 비율로 배출해 낸 기술력이 강한 나라, 에어로크.
에어로크는 국토가 작은 나라지만 외교적 중립성을 띠는 특성으로 인해서 세계적인 교류가 원활하고, 선진국임에도 국가의 제재와 간섭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네마가 연구 활동을 하기 자유로운 나라다. 또한, 국력은 강한 편이지만 초강대국 반열에는 들지는 못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강력한 세력들과 단체들의 영향을 적게 받아, 비교적 비밀이 적고 때 묻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로 알도르프 출신의 플로메한도, 사테파르 출신의 본픽시오도 현재 에어로크에 거점을 잡은 것이다.
네마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면 모든 지원이 끊기는 것은 물론, 남아있는 모든 자원을 반납해야 하지만 네마의 자격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연맹에서 받은 모든 지원은 온전히 네마 본인의 소유다.
텔레스트 또한 네마가 됐을 때, 여느 네마와 같이 연맹과 국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는데, 그는 대부분의 네마와 달리 현금으로 지원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58층 빌딩과 높은 등급의 프르소를 요구했다. 초기부터 연구소에 많은 투자를 한 만큼, 현재 시무스 연구소의 명성은 텔레스트의 명성과 같이 아주 높고, 시설과 장비가 좋기로 유명하여 들어오고 싶어 하는 프르소 연구자들이 넘치고 넘친다.
"마키스, 똑같아."
빌딩의 모든 권한은 토파이오의 인정에 따라서 네마인 텔레스트에게 있지만, 텔레스트는 프르소들과 후배 연구자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과학 발전을 더욱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네마의 직책을 유지하는 동안, 시무스 연구소의 모든 권한을 단순히 본인이 갖는 게 아닌, 연구소장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에게 일임된다는 조건과 함께 누구나 걸맞은 성과를 낸다면 연구소장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조건을 스스로 걸어놨다.
"완전히 똑같다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예상대로 증가한다."
덕분에 시무스 연구소는 성장과 발전을 활발히 거듭했고, 시무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1,426명의 연구자들 중 대부분은 네마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시무스 연구소장이 될 수 있다는 목표와 함께 연구소장 자리를 노리며, 성과를 위해 열심히 연구에 매진한다.
"기존 방정식을 보완해서 몇 개 더 만들었는데, 모두 다 예측대로 확률이 높아지고 있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텔레스트가 또 한 번의 계산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며 마키스에게 말한다.
"하아, 야, 그래서 뭐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방법은 좀 찾아봤어?"
감마선 폭발에 대해서 절대 함구하기로 했던 텔레스트는 사회의 붕괴와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 공표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 토파이오에 보고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을 했었다.
'텔레스트 형은 네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정상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마키스가 토파이오 내부에는 정보력이 강한 국가들의 정보원이 섞여 있으니, 토파이오에 발설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고 그를 설득하여, 토파이오에 보고하는 것을 막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인류의 존속을 배제한 나의 계획은 형에게 충격일 테고, 내게 적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텔레스트는 종말이 다가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울증이 심해졌고, 마키스는 그런 텔레스트에게 프로젝트 아이에 대해 설명할지 말지를 고민해 왔다.
'역시 말하면 안 되겠어.'
또한, 지하 도시와 같은 정상적인 계획이라 할지라도, 계획이 있다면 토파이오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토파이오에 보고하는 것 자체를 막아야 하는 입장인 마키스는 애초에 계획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 아직 계산 중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곧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어."
텔레스트는 우주를 가장 올바르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이 종말을 가장 잘 이해하기에, 이번 재앙의 공포를 그대로 마주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대답으로는 그의 불안을 누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어느 정도 잡혔다는 틀이 뭔지 말해봐. 이러다가 종말 전에 내가 미쳐버리겠네."
"미안해 형, 당장은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너, 지금... 179일밖에 안 남은 거, 알고는 있는 거야? 아니, 당장 내가 생각해 보더라도, 지하 도시 같은 게 떠오르는데, 빨리 토파이오에 보고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묵묵부답인 마키스.
"책임 못 질 것 같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말해, 괜스레 시간만 끌지 말고!"
텔레스트의 고함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더니, 잠시 후 분노는 불안으로 바뀐다.
"아냐, 미안... 내가 불안이... 약을 먹고는 있는데, 너무 심해서... 미안..."
마키스는 주저앉아 떨고 있는 텔레스트를 가볍게 안아준다.
"형, 정말 미안해."
지금은 한없이 무력해 보이는 텔레스트지만, 최상위권 네마인 그는 위대한 천체물리학자이며,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 물리학에 통용되는 수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겨, 교과서에도, 전문 서적에도, 주요 논문에도 빠지지 않으며, 젊은 나이서부터 시작한 교수직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제자들을 키워왔다.
많은 과학자의 이상이자, 우상인 그는, 세네큘라에게도 그랬다. 세네큘라는 대학생이 되면서 자신의 교수로 텔레스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세네큘라 알리토브레, 잠시 일어서 줄래?"
세네큘라는 영문도 모른 채 수업 중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매번 강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맨 앞에 앉았었는데, 그날따라 조금 늦게 도착해버려서 강의실의 정중앙에 앉게 된 날이었다. 덕분에 말 그대로 모든 학생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혼자 일어났었다.
"지금 이 수업을 듣고 있는 63명의 학생 중 단 한 명만이 완벽하게 정답을 맞춰냈다."
앉아 있는 모든 학생들은 세네큘라를 올려보더니,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박수갈채를 받아봤었다. 그녀는 텔레스트의 학생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우수했기에, 대학원으로 진학한 후에 그의 조수가 될 수 있었고, 약 2년간은 서로 가까이 지내며 많은 가르침과 배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텔레스트는 1급 프르소를 넘어서 네마가 되었고, 교수직을 떠나 시무스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면서, 언젠가 시무스 연구소에 들어가 그를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며 노력해 온 세네큘라였다.
그녀는 혼자가 돼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진전하며, 훌륭한 과학자가 됐고, 여러 다른 연구소에서 경력을 쌓으며, 드디어 시무스 연구소에 들어왔다. 다시 그의 조수가 되어, 이번에야말로 교수와 제자가 아닌, 선배와 후배이자, 동료로서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게 됐다.
그런 세네큘라는 그의 연구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저 텔레스트가 점점 더 걱정된다. 감마선 폭발의 위협을 찾아낸 방정식을 만든 장본인이자, 텔레스트의 조수인 그녀는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녀 역시 불안하고 답답했지만, 텔레스트의 말을 듣고 억누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아하니, 그 역시 저 마키스라는 네마의 말만 듣고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네큘라는 텔레스트의 말을 믿고 모든 내용을 비밀로 지키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참을 만큼 참은 그녀는 폐인이 되어가는 그를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기에, 오랫동안 고민해 온 행동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