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아마 그 기준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할 것이고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기준은 이렇다. 다수냐, 소수냐. 아무리 틀린 노예 제도라도 그 시대라면 다수의 당연함이었고 아무리 옳은 혁명이라도 그 시대라면 수소의 반란이었다. 나는 이 기준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동의한다. 둘 중의 하나라면 다수가 중요하니까. 이 세계에는 인간이 아닌 인류가 살아가고 있고 내가 그 인류에서 얼마든지 탈락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수의 옳음을 배우고 그 속으로 들어가 소수의 다양성을 뽐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세상에 나온 지 4년이 되어가지만 내가 사람을 만나고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할 때가 있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면서 사고방식이 변하고 내가 원하는 나를 연기하여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는데, 간단했던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폭발하듯 변하긴 했지만 폭발하기 직전까지 오랜 기간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중첩되었다. 나를 깊고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들어 줬지만 어둡고 아프고 힘들었던 지난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다.
내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계기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이유였다. 소중한 것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그 이전까지는 학교와 군대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만 지내왔기 때문에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바빴지만,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사람을 거부하는 마음이 필요 없어지면서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진심 속에 사람을 거부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닌, 사람을 원하는 마음 또한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한 게 내 첫걸음이었다. 물론, 사람을 원하는 마음의 크기가 정상적이지 않긴 했지만,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차분하게 내가 사람을 거부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종이에 적어봤다.
나를 싫어하고 거부할까 봐.
내 부족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내 부족한 모습이 타인에게 기억되는 게 싫어서.
특정한 사람에게 집착하고 의존하게 될까 봐.
한 번 친해졌다가 다시 멀어질까 봐.
혹시라도 배신을 당할까 봐.
나는 완벽주의자다. (부모님을 제외하면)난 살면서 타인에게 실수했던 흑역사를 만든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일찍이 인지했고 그런 내가 어디에서도 실수하지 않도록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게 곧 내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있어서 거절당하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배신당하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믿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무시당하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허튼 짓을 하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실패하는 나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전하는 나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내 정신 연령은 늘 어렸지만, 철이 없던 적은 없다. 어린아이일 때부터 예의와 예절을 중시했고 내 외적 이미지에 큰 가치를 뒀으며 내 평생을 통틀어 흔히 말하는 '철이 없어서 타인에게 실수했던 젊은 시절'은 단 1초도 없다. 항상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내 목에 목줄을 채워 관리했다.
그렇게까지 했던 내 행동의 원초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현재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있는데, 내가 쓴 소설 중 일부를 발췌하고 싶다.
현재의 마키스와는 다르게 원래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던 명랑하고 따뜻한 아이였다.
아주 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하는 그의 여린 마음씨가 상처받을 일은 없었지만, 청소년기가 되고 성인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많아지는 크고 작은 '안타까운 일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그런 면에 있어서 마키스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못 하는 아이였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 마키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일반적인 인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마키스는 인간을 사랑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고귀하길 바랬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에게서 느끼는 실망의 크기가 수용 가능 범위를 넘어서자, 그는 자신이 믿는 이상적인 인간상과 현실의 인간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인간이 아름답고 존엄하며 인간답기를 바랬던 그는 자신의 기준에 미달되는 인간들을 부정하며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인간을 사랑한다. 그의 기준에 충족되는 인간의 수가 극도로 적을 뿐.
자신의 이상형에 맞는 완벽한 인간을 찾으려 노력하기도 했었지만, 그런 환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타인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자신 또한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기도 했었던 마키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내 과거를 돌이켜보니, 나는 인간에게 거부감을 갖게되는 마음을 지닌 채 성장했다.
한번은 초등학생 때, 다른 초등학생들이 나뭇가지로 매미를 찢어 죽이면서 웃는 걸 보고 엄청나게 울었는데, 찢어 죽인 얘들이 당황해할 정도로 울었다. 초등학교 후문으로 나가는 길, 경사진 아스팔트 바닥 아래에 이미 한쪽 날개가 떨어진 매미는 다리를 발발 떨고 있었고, 나뭇가지가 배를 관통한 뒤에도 매미의 다리는 여전히 발발 떨리고 있었다. 이유라면 너무 슬펐기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아마도 그 안의 역겨움이 나를 크게 동요시켜 울렸던 것 같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쾌락을 위해 상대방을 능욕하고 모든 것을 빼앗았던 그 역겨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일어날 법한 일이다.
한번은 중학생 때, 영화 테이큰을 봤었는데 내용과 결말을 떠나서 가족이 약점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이후, 나는 소중한 것을 늘리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런 영향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뉴스에서 나왔던 나쁜 사람들이나 물의를 일으킨 정치인들, 학교에서 왕따시키는 얘도 왕따당하는 얘도, 밖에 나갔을 때 시끄러운 사람들, 차량 배기음을 일부러 증폭시킨 사람들, 내게 혹은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들,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강자인 척하는 자와 그런 자에게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자 모두 혐오스러웠다.
나는 진심으로 인간이 고귀하길 바란다. 바랬다. 누군가가 1인분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1인분 이상을 해야 한다. 모두가 알려진 방법대로 제대로 분리수거를 한다면, 누군가가 분리수거를 다시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쓰레기통에만 버린다면 누군가가 허리 숙여 쓰레기를 줍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인간을 사랑했고 항상 아름답게 빛나길 바랬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완벽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자신이 선택한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사실, 내 삶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기보다는 삶이 정해주는 생존의 룰을 따라야 하는 쪽에 가까운 듯하다.
내가 바뀌게 된 계기 두 번째, 바로 오만을 내려놓은 것이다.
인간이면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리를 거부한 나는 그 거부의 부작용으로 사고와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성장됐고 최근이 돼서야 받아들이게 됐지만 아직도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잔존해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고 오랜 기간 나조차도 속일 정도로 내가 만든 캐릭터에 몰입해 왔던 것이다. 내 마음속에 거대한 댐을 만들어 스스로 사막화되는 것을 자초했다. 그동안 오만했다.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난 그저 인간이며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난 후로는 대부분의 문제가 허망할 정도로 사라져 버렸다.
나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부족한 글을 써 올릴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분수에도 맞지 않는 완벽주의자의 신념을 지켜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 글을 완성시키므로써 내 완벽주의자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여전히 내 모든 신념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리해서 쫓지는 않기로 했다. 완벽을 쫓지 않고 나를 내려놓으니, 마음속에 얽히고설킨 신념이라는 무거운 쇠사슬이 풀린 것 같다. 이제는 흐트러져 볼까 생각 중이다. 대충 살려고 한다. 사실, 이 생각도 1년 전부터 마음먹었지만,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서서히 하나씩 내려놓아야겠다.
큰일이다. 내 이야기는 끝나가는데 해피 엔딩의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굉장히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내 비정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오염수에 물을 타가며 오염 농도를 낮춰가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정상을 추가해 가며 비정상의 농도를 낮춰가는 식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과거의 문제는 사실 여전하다.
여러분이라면 스스로 정신 질환과 성격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 십 년간의 상담과 약물 치료를 받아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내 문제는 평생 나와 함께 할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다. 내 결핍의 특징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여전히 거부 반응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적응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인간이 혐오스럽다면 그들을 자신과 분리하지 말고,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사고를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인간은 인류라는 양자컴퓨터의 양자 같아서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가 되어가지만, 그 뿌리만큼은 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공감의 한계는 존재하겠지만, 이해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