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을 만났다.
먼저, 여기서 기독교인이란 비종교인인 나로서 종교인인 그 분을 존중하며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아 표현되는 단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친가와 외가의 여러 분들 중 다수가 기독교를 믿고 계신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무지하지만, 그들을 무시할 만큼 어리석진 않다.
내 인생에 기독교는 물론, 종교에 대한 어떠한 것도 어제가 처음이었다.
교회에 간 것도, 설교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하디귀한 성경책을 선물 받고 그 두꺼운 책 속에 얇디얇은 종이 단 한 장을 필사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진지하게 마음을 담아 한 장을 필사하는데 약 1시간 20분이 걸렸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내가 어떠한 내용을 읽고 적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필사 후에는 기독교에 대한 궁금한 내용을 그 기독교인에게 질문하고 그분에게서 깊은 내용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내가 느꼈던 종교에 대한 견해를 기록하려 한다.
가장 크게 느껴졌던 점은 방대함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그려내는 모든 것들은 방대하고 거대하다.
인간 하나에 온전히 담아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그러하다.
비종교인이 그리는 원은 A4 용지에 들어갈 만큼의 크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원은 누가 봐도 원이고 누구라도 원이라고 인지한다.
하지만 종교인이 그려내는 원은 지구에도 그려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하다.
그렇기에 그 거대한 뜻을 이해하는 자는 원이라 인지할 수 있으며 나같이 이해가 부족한 자는 그저 선으로만 보이게 됐다고 생각한다.
종교인이 비종교인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종교인의 다수는 비종교인의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비종교인은 사랑을 인간하고만 한다.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다. 자신이 준 사랑이 거절당할 수도 있고 배신당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나 같은 경우는 그 불안정했던 시기에 사랑할 대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현재의 애정결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종교인은 그 종교의 신을 사랑한다.
신은 한계가 없는 존재다. 자신이 드린 사랑만큼 믿음으로 보답받는다.
[정정하자면 드린 만큼 돌려받는 게 아닌, 이미 아가페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겹겹이 쌓이는 사랑의 나이테가 정신의 나무 속을 단단하게 채워준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사랑에서는 찾아보기 쉽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지하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존재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켜봐 주시며 그 관심에 깊은 감사와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성실함의 표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심심치 않은 비종교인의 무지와 눈초리를 견뎌내며 묵묵히 자신의 믿음을 실천한다.
그들은 비종교인이 ‘가상’이라 치부하는 종교인의 ‘역사’를 배우며 공유한다.
평생을 공들여 노력해야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의 방대한 역사를 담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배움을 배우지 못한 자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나누려 할 뿐이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종교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는 배우지 못한 자다.
나는 비종교적 세계관이 종교적 세계관 속에 있는지, 혹은 그 반대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둘 다 하기로 했다.
내 머리는 의심에 비중이 높고 믿음의 비중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종교를 믿을 수 있을 사고방식이 아니다.
내가 종교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내 안에 종교인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내 안의 종교인과 비종교인 중 훗날 누가 잡아먹고 먹힐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둘 다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