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이 여성 독립운동 가하면 막연하게 잘 떠오르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요...
대중영화 암살에 보면 전지현이 독립운동 조직의 우두머리로 나옵니다.
이는 실제로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롤 모델로 한 것이죠
남자현은 실제로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하려다 아쉽게도 실패하게 됩니다...그렇다면 과연 역사 속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남자현 지사말고는 없었을까요? 당연히 존재합니다
독립운동의 종류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합니다. 총, 칼로 일본에 직접적으로 저항한 무장투쟁운동, 그리고 펜으로서 우리의 문화를 지킴으로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저항한 실력양성운동 등도 존재하지만
이 들의 운동이 계속 지속될 수 있게 뒤에서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는 것 또한 독립운동
의 일환입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중 1명인 강혜원 지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어린 시절 하와이로 이민 가다
강혜원 지사는 1885년 평양에서 아버지 강이고 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서 맏딸
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불우하게도 아버지 강익보는 술과 기생을 좋아하여 가정을 보
는 것을 소홀히 하였는데요. 이에 어머니 황마리아는 '강가에게 시집을 잘못 왔다'라
며 한탄하며 자녀들에게 '나는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너희들을 공부
시키기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며 미국행을 결심했습니다.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1월부터 1905년 7월경까지 대한 제국 정부에서 알렌의 건의하게 이뤄졌고요. 이 시기 강혜원 선생님 및 황마리아여사는 남편을 두고 첫째 강영승 부부 등 5가족과 함께 하와이 이민을 신청하여 하와이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하와이 이민을 주도하던 '동서개발 회사'가 독점을 했는데요. 이곳에서는 '하와이에 가면 학비를 받지 않고 편리함을 공급함'이라는 거짓선동을 했습니다.
실제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서는 이미 네 회사에서 미리 돈을 내주고 이민자들이 노동으로 갚게 하는 전대금 제도로 운용이 되었는데요. 실제로 이곳 하와이에 이주한 사람들은 사탕수수밭에서 개간, 종묘 심기, 김매기, 밭에 물 대기 등의 고된 중노동을 하며 한 달 50달러를 벌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푼 두 푼 모으면서 전데 금을 갚고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후 강혜원 지사는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돈을 벌며(삯바느질 한 벌 25센트, 빨래 5센트) 만 놈아 벨리 여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2년을 수학한 후 선생은 어머니와 함께 대한 인 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 부인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한학자인 김성권과 혼인을 하고 샌프
란시스코로 가게 됩니다.
2. 샌프란시스코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사실 샌프란시스코에 이주한 이후에도 생계는 녹록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롬 폭위 농장에서 일했고 선생은 바느질을 하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장마로 인해 생계가 막연해지자 다 뉴 바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곳 다뉴브에서 5년 정도 지났을 때, 국내에 3.1운동이 발생했다는 말을 선생은 듣게 됩니다. 이때 마침 다뉴브에 안창호 선생이 방문하여 선생과 만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올케 강원인을 비롯하여 한성건, 한영숙, 한신에, 김경애 등과 신한 부인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 조직의 목적은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 국민회에 의무금 납부였습니다. 이후 미주 지역의 여러 독립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 여자애국단이 창립되자 선생은 이 대한 여자애국단의 총 단장과 총 부 위원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대한 여자애국단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를 냈다고 하네요. 그리고 선생을 비롯한 대한 여자애국단 단원들의 돈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고 합니다. 이후 선생은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대한 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 지부 부단장이 되었고, 1929년에는 한인 2세를 위한 국어교육기관을 조직하고 국어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한인 아동 교육기관 기성 발기위원이 됩니다. 1940년 대한 여자애국단 제8대 총 단장으로 다시 뽑혀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선생은 이후 1977년 10월 자신과 '대한 여자애국단의 사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 출납'이라고 하며 그 내역을 열거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에 1,000달러, 공복 위로금으로 500달러, 상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300달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군축 선전비로 500달러, 신한민보(新韓民報社) 식자기 값으로 500달러, 간도(間島) 동포 기근 구제금으로 67달러, 송미령(宋美齡) 여사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동포 하바나로 이주해 갈 때 동정금으로 40달러, 쿠바 마탄사스 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172달러, 본국 소년 갱생 운동에 55달러, 황온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 미군 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羅城-로스앤젤레스) 출정(出征) 군인 무도회에 194달러 등으로 총 출납 액수가 46,298달러”
-강혜원 선생님-
생은 1982년 5월 31일 오전 10시 96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3. 글을 마무리하며
1910~45년의 일제강점기. 악명 높은 일제의 잔혹한 무단통치를 거쳐 문화통치, 민족말살 통치 시기를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변절을 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를 때도 꿋꿋하게 독립을 추구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독립운동가들이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끔 유지했던 그 기반은 미주와 해외에서 보내주는 독립운동
지원금이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하와이로 건너가 삯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15센트씩 번 돈을 바탕으로도 매달 3달러는 꼭 독립자금으로 기부했던 강혜원 지사. 그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한인 2세를 위해 교육사업에도 힘을 썼던 지사의 뜻은 오늘 날에도 독립된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꽤 많은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도 '나의 자손만큼은 식민지 조국에서 살지 않기를'바랐던 강혜원 지사의 뜻을 기리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묻혀 계시다가 2016년에 남편과 함께 유해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
출처:공훈 전자 사료관 (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