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2.8독립선언을 이야기하자면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지요. 바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인데요. 윌슨은 1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를 처리하는 것에 대한 해법으로 '민족 자결 주의'를 내세웁니다. 이는 '모든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이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대해서만 적용이 되었지만, 당시 승전국의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한 줄기 빛과같은 선언이었을 겁니다. 특히 일제 치하하에서 10년동안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서 땅을 뺏기고 강압적인 통치를 경험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사람들에게도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죠. 이에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이들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려줄 시에 열강이 우리의 독립을 도와 줄 것이라는 패러다임이 만들어졌습니다.
2. 무오독립선언
무오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소앙선생님.
동경에서 앞서 무오, 그러니까 연해주에서 먼저 독립선언 낭독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소앙, 박은식등 39명의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1918년 11월에 독립선언을 했는데요. 이 독립선언을 무오년(1918년)에 있었던 독립선언이라 하여 무오독립선언이라고 합니다. 무오 독립선언의 개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思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독립선언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3. 2.8독립선언
이 무오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은 다수의 재일 유학생들 역시도 독립선언할 것을 결의합니다.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의 주도하에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등은 2월 8일 도쿄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습니다. 2.8독립선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사람들.
①본단(本團)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②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를 요구함. ③본단은 만국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해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공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그 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명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 위원은 이미 파견된 우리 만족의 위원과 같은 행동을 취함. ④앞의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위와 같은 2.8독립선언을 하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경찰은 주동자 60여 명을 체포하고, 그중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송계백, 서춘, 김상덕, 이원군 등 9명에 대해 일체의 방청을 금지한 재판을 열고 출판법 위반을 걸어 최팔용, 서춘은 1년, 그 외는 9개월에서 3개월까지 금고에 처해졌습니다. 이 중에서 체포되지 않은 일부 조선사람들은 일본 국왕이 머물고 있는 궁성 근처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4. 의의
이 2.8독립선언문은 춘원 이광수가 지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해서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제작을 하였죠. 결국 2.8독립선언문의 정신이 3.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기미독립선언서에는 2.8독립선언의 정신이 있습니다. 즉, 3.1운동의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이 2.8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5. 내 생각
이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저 시위를 주도했던것은 20~30대의 젊은 청년과 학생들이었습니다.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은 사실 엄청난 용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텐데요. 저기에서 최팔용은 금고형 1년을 받고 형을 모두 마친 후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2년 후에 숨졌다고 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꽃다운 청춘들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해야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