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선생님은 1930 40년대 이육사선생님과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고결한 삶에 대해서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
1.생애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습니다.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루타 부대에 속해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 십자가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습니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사나>, <거짓부리> 등이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습니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1948).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습니다(1968).
2. 그의 대표적인 시 <참회록>
윤동주 선생님을 다들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양심있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했고,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르면서도 스스로 반성하는 진정한 양심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윤동주 선생님도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이는 조선식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히라노마 도쥬' 그는 사실 이러한 이름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씨개명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한 윤동주 선생님은 저항의 의미로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창씨개명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웠던 나머지 이에 대한 저항시를 쓰는데요. 그 시를 한 번 발췌해봤습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회록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고봉준, 정선태,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 작품에 그는 마지막까지 창씨개명한 자신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을 잘 표현했습니다. 당시 기초적인 학교 생활등을 하기 위해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윤동주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3. 내 생각
한국은 이미 문화 강대국입니다. 독특함 뿐만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까지 갖춘 한국의 문화는 연일 넷플릭스와 케이팝을 통해서 세계인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요. 이러한 문화적 독특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도인 제가 생각하기로는 과거부터 오랫동안 이어져온 강한 민족적 자주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라는 세계 1위의 강대국을 옆에 두고도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던 수 많은 민족들(여진, 거란, 요족, 묘족등)과 다르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자, 문화를 갖고 자주적 문화를 유지했던 한국.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강한 자주성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를 융합하여 현재 독특한 한류문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이 사실 일제시대 크게 위협을 받았었죠.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으로 한글과 한국의 문화, 정신까지 모두 뺏으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불고 23살의 나이에 창씨개명한 자신을 반성했던 윤동주. 이와 같은 양심있는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가 유지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양심있는 지식인들. 우리가 기억해야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