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조선의 제 4대 임금이지요. 아버지는 태종 이방원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입니다. 사실 세종은 조선의 종법제도에 따라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날나리 형님이신 양녕대군의 만행덕분에 세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지요. 그는 22살의 나이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이 됩니다. 하지만 당시 군권은 태종이 갖고 있는 상태였지요. 태종 이방원은 군권을 갖고 한 동안은 자신이 권력을 유지한 상태에서 대마도 정벌이란 큰 업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4년간의 일명 임금수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스스로 정치에 임하게 되었죠. 사실 세종대왕은 건강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위기간 32년 중 4년은 임금 수업, 그리고 후에 마지막 8년은 거의 병으로 앓아 누워있음으로써 실질적으로 정치에 임한 것은 20년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 20년동안 그가 한 업적들은 그야말로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애민정신에 입각한 정치였습니다. 사실 그의 업적을 다 이야기하면 너무너무 많아서 간단하게 몇 개만 줄여서 이야기하겠습니다.
1. 한글창제
2. 화약무기인 신기전과 다연발포 화차 발명(이 화차는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합니다)
3. 김종서 최윤덕에게 명하여 4군 6진 개척하여 현재의 한국 국경 확보
4. 조선의 독자적인 역법인 칠정산 제정
5. 측우기, 앙부일구등의 과학 기기 발명
6. 공평한 조세제도 마련
7. 법전 완비
8.박연과 맹사성의 아악 정리로 예악 완성( 예악은 유교 의례 때 쓰이는 음악을 말함)
9. 집현전 설치
10. 갑인자의 발명 (갑인자는 지금의 인쇄기입니다)
11. 농서 편찬
11. 백성에 대한 형벌 최소화(반란이 일어나도 방화범 말고는 극형, 즉 사형에 처혀는 경우 거의 없었음)
집현전
이게 요약한다고 요약한 것입니다 . 그래도 이 정도가 나오는 것이지요. 사실 조선 왕조의 대부분의 업적은 세종으로부터 나옵니다. 저는 이 많은 업적들 중에서 그가 얼마나 애민군주였는지를 보여주는 몇몇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 세계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한 세종
세종의 애민 정신은 엄청났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근, 즉 비가 안와서 농사가 안되면 그는 궁궐 외곽 쪽에 초가집을 짓고 거기서 거처하면서 가난 한 농민들의 슬픔을 같이 느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농업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요. 그 결과물이 바로 '농사직설'을 편찬케 한 것입니다.
농사직설
이는 기존의 중국식 농법만 정리된 책들과 달리,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에 오랜 농사꾼들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중국의 농법을 우리에게 맞게 정리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측우기, 그리고 좀 더 농사 철에 정확하게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사정에 맞는 달력인 칠정산 역법까지 정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농서로도 부족했는지, 그는 효율적인 세법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는 당시의 조세제도가 답험손실법이라 하여 마을에서 힘이 센 향리가 등급을 3등급으로 매기고 그대로 수취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을의 힘센 향리들이 자기 마음대로 책정을 해서 농민들이 손해를 많이 보는 구조였습니다 이에 세종은 관리가 풍흉(풍년과 흉년의 정도-비가 많이 내리는지 적게내리는지를 의미합니다)과 토질에 따라서 연분9등(풍흉), 전분 6등(토질)으로 나눠 4결에서 32결에 이르기까지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수취하는 공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부자에게는 많은 세금을 내게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은 세금을 내게하는 아주 합리적인 조세 체계였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종대왕은 이 것이 혹시 백성들에게 폐해가 가지 않을까 싶어 세계 최초로 여론조사를 실시합니다. 이에 따라서 전국의 17만명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3. 노비도 백성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던 군주
지금도 사실 학교 생활하다가도 여자 선생님들이 육아 휴직하는 것에 대해 눈치를 주는 학교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육아휴직은 좀 더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00년전 세종대왕은 일반 백성도 아닌 관노비에 출산 휴가를 줍니다. 관의 여노비에 대해서 출산휴가 100일을 제공하고, 심지어 남편에게는 30일의 육아휴직을 제공했다고 하네요.
4. 국방도 강화했던 군주
이종무가 주도한 대마도 정벌
세종은 국방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태종이 태상왕인 시절, 대마도 정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맺어진 '계해약조'를 통해 왜구들에게 합법적인 무역 루트를 제공함으로써 왜구를 거의 근절시켰습니다.
4군6진 개척을 주도한 김종서
그리고 여진족의 이만주가 1432년 여연에 침입하여 주민과 군사들을 죽이는 사건이 벌생하자 분노한 세종은 최윤덕을 토벌군으로 하여 총 1만 5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4군 6진을 개척케 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천으로 하여 '총통등록'이란 화약 무기 제조 설명서를 제조하게 했습니다. 원래 기존에도 최무선 이후 화통도감에서 화약무기를 개발하긴 했지만, 세종시기 부터 신식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여 신기전, 화차, 일발다전포인 사전총통, 팔전초통등 다양한 화약 무기들이 제작되었고 문종 1년에 이르면 약 700대이 화약 무기가 전국에 배치될 수 있었습니다.
화차
이 무기는 사정거리가 1,500m를 나간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를 가진 국가가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 시기 조총 사정거리 100~150m) 이러한 세종 조의 노력덕분에 200년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주산성에서 교과서에서는 민관 합동 작전으로 가능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러한 압도적인 화력의 화차 및 총통 덕분에 3만의 일본군에 맞서서 1만도 안되는 조선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조선=세종이었습니다.
화기를 제대로 이용했었던 행주대첩
4. 내 생각
유튜브에서 요즘 김구선생님과 세종에 대해 비하하는 영상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자료도 아니고 뇌피셜에 입각해서 정확한 맥락도 모른체 비판하는 거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이 그 영상을 보고 '세종이 폭군이었다는데요'라 듣는 순간 정말 그 영상 제작자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relax.....)
하지만 위에서 밝혔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말하다 싶이 세종은 동양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군주였습니다. 애민정신에 입각한 정치였고 그는 신분제 사회 속에서 거의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 노비에게까지 출산 휴가를 줄 정도로 정말로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세종대왕의 정신. 위에서 적지 않았지만 우리가 IT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끔 해준 한글 창제를 하시기도 하고,
훈민정음
그 이전까지 중국식 농법, 중국식 역법(달력), 중국식 문자, 중국식 문화, 중국식 예법, 중국식 음악만을 따르다가 드디어 우리만의 조선식 역법, 농법, 문자, 문화, 예법을 만들게 해준 정말로 위대하고 너무도 고마운 군주입니다. 우리가 지금 한류 열풍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세종대왕시기 만들어졌던 독자적 문화가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떄 만들어진 한글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의 행적들은 여전히 기록에 남아서 여전히 위정자들에게 진짜 멋진 관리, 목민관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돼지고기 매니아에 운동을 안좋아하신 세종대왕님은 30대에 안질에 풍질(신경통), 종기가 생기기 시작했고 40대에는 당뇨까지 시작도어 몸이 나빠지셨습니다. 수전증과 고혈압까지 있었던 세종대왕님은 결국 마지막까지 건강 악화로 인해서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수 많은 애민정신에 입각한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의 애민정신 또한 여전히 살아 숨쉽니다. 우리의 민족 문화를 창달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대왕님!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