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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Feb 20. 2022

오늘의 역사는?2월21일(신채호 선생님)

오늘은 2월21일! 오늘의 역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신채호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저명한 역사가였던 그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도록하겠습니다!




1 .생애


어릴 때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성균관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정도의 엄청난 수재들만 가는 곳인데요.

거기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0살 초반 때부터 독립운동을 한셈이지요...)


그는 20살 중반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습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는 「독사신론(讀史新論)」 을 여기서 썼는데 이게 정말 역사적으로는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중국 중심의 화이사상!에 입각한 역사관이었는데

이 독사신론부터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천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친일적 사관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비판하였고 그는 고구려, 부여중심의 역사관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제시합니다

동시에 그는 나라가 뻇길 위기에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을지문덕전」 등의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애국심을 고취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이후 그는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정말 유명한 말이 있는데요.... 아래와 같습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2. 조선혁명선언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는 배경은 이러합니다. 이전에 김원봉은 의열단을 창단하여

일본의 주요 인사 및 친일파를 척살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신채호 선생님께 부탁을 합니다

이에 신채호 선생님이 쓴 것이 조선혁명선언입니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만 할 수 있으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10만이 폭탄을 한 번 던진 것만 못하며, 천억 장의 신문, 잡지가 한 번의 폭동만 못할지니라.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ㆍ암살ㆍ파괴ㆍ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혁명선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어떤 분들은 이 의열투쟁을 테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의열투쟁은 개인적으로 정말 정당한 활동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제는 합법이란 미명아래 너무도 많은 인권유린과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3.1운동 때, 무기 하나 들지 않았던 민중들에게 유혈 진압을 했던 일제의 합법적 영역에 의해 7500명이 사망했으며 10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도에는 합법이란 영역아래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져 정당한 결사운동을 해도 모진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했으며 산미증식계획으로 국내의 쌀 수요가 급증하여 쌀 값이 올라 만주로 사람들이 이주하기도 합니다. 1930~40년에는 한글조차 배우지 못하게하고 약 20만명에 이르는 어린 소녀들을 위안부 성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일본은 애초부터 조선인들을 인간대접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영역에서 폭력이 아닌 외교를 통해서 해결한다는 노력하에 자치론이 나왔고

자치론을 주장했던 이 들은 30년대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과연 무장독립투쟁론 외에

제대로 된 독립운동이 있었는지 정말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의 조선혁명선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3. 내 생각


신채호 선생님은 독립운동사에서도 그리고 역사학에서도 엄청나게 비중있는 분입니다. 정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조선상고사란 명저를 남기셨으며 신민회, 임시정부, 독립협회등 거의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할 정도로 독립운동도 활발히 하셨습니다.

그의 순국은 너무도 쓸쓸했지만, 민족위주의 역사를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민족을 지양하는 역사학을 추구하고 있지만

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과연 우리는 민족주의는 제대로 이뤘는지도 의문입니다.

친일파 청산도 못했으며 남북통일도 못했고, 전라도 경상도로 나뉘고, 남녀로 나뉘고,

보수의 가치, 진보의 가치가 이념에따라서 나뉘고 배척되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민족주의는 이룬 것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자이자 마지막엔 직접 아나키스트로서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셨던

신채호 선생님! 우리가 그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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