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소년 Feb 22. 2022

오늘의 역사는? 2월 23일(러시아 혁명)


오늘은 2월 23일인데요~


오늘의 역사는 무엇일까욥?_?

러시아 혁명의 상징 레닌

바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날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알아볼까욥?



- 러시아 혁명 당시 혁명 세력-
1. kadets당(입헌민주당): 입헌 군주제 하에 자유주의적 의회가 정치 운영하는 형태 추구
2. 사회혁명당(기존 인민의 의지, 인민속으로): 농민들 위주의 정책, 토지 개혁 중시
3. 사회주의 정당
1)맨셰비키: 점진적 사회주의 추구(2단계혁명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
2)볼셰비키: 급진적 사회주의 추구(자본주의 단계 필요없이 자체적으로 산업 발전 통해 공산주의 가능하다고 주장)











1. 배경

러시아는 19C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시작하며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은 갖췄지만

여전히 황제전제정치였고, 농민의 지위가 열악하였는데요(농노제)

이에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 폐지등의 여러 개혁을 했지만

그가 인민의 의지란 급진적인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로 더욱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강해졌습니다

체카라 불리는 비밀경찰들이 대학과 출판등을 모두 검열하였고

불온 서적이라 불리는 책을 집필시 목숨을 잃는 등 러시아 사람들의 자유는 열악하였죠...




피의 일요일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점거당한 뤼순항


그러던 어느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패배하게 됩니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엄청난 양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는데요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발생한 배상금과 전쟁 비용으로 인해서 세금이 늘어나자

이에 민중들이 광장으로 나와서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합니다

그 들은 의회 개설과 보통선거를 원했지요

평화적으로 시위했던 이 들이었지만 황제는 이에 대해

유혈진압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에 시위가 더 확산되고 격화되자

황제는 자유주의 개혁을 약속했고, 이에 시위대는 물러났죠.


성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평화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총을 발사했던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 때 약 1천명의 민중이 사살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약속은 거짓말이었고

귀족들로 수성된 두마란 의회를 창설하였고, 보통선거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의 기본권만 더 탄압하고

자유주의 단체들만 더 억압하였지요...

이러는 가운데 1차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황제가 전쟁에 신경을 쓰는 동안

궁중에서는 그 전설의 카사노바인 라스푸틴이 등장합니다.

라스푸틴은 왕비와의 불륜을 했다는 말도 있고, 여러 말이 있지만

어쨋든 러시아 재정을 낭비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타넨베르크 전투 

그리고 1차대전에서 독일에 전쟁영웅 힌덴부르크에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대패한 러시아군은

사기를 잃었는데요...

그리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보다못한 시민들이 일어서게 됩니다.

시민들이 다시 광장에 나와 자유주의 개혁을 요구하자

황제는 이를 유혈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지요

하지만 군대마저 이번엔 황제를 버리고 민중들과 합세를 합니다.

이렇게 되어 이 노동자, 병사로 구성된 시위대들은 궁성을 점거하고

황제를 퇴위시킨 후 임시정부를 만듭니다.

이 것이 바로 2월 혁명입니다!






라스푸틴

그의 직업은 수도사, 순례자, 예언자라 합니다. 니콜라이 2세의 왕자가 혈우증으로 앓아 누워있을 때, 라스푸틴의 도움으로 병에서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것을 계기로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신의 계시'란 이름 하에 러시아 군을 남부로 돌려서 총력전을 펼쳤다가 대패를 하기도 했으며, 국정을 농단하여 이후 귀족들에의해 척결됩니다.





2. 2월 혁명 이후


2월 혁명 이후 kadet(입헌 민주당)란 자본가위주의 당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민중들에게 전쟁을 지속하는 대가로 전쟁 이후에 토지 개혁, 보통선거등을 실시하겠다고

약속을 하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에 공산주의 혁명을 원했던 레닌의 볼셰비키와 군부 세력의 위협은 엄청났습니다.

특히 레닌의 경우 민중들을 선동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에게 빵과 평화를!


전쟁에 지쳐있었던 민중들은 이 말에 귀기울이며 레닌을 따랐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세력이 확대되자 봉기(7월 봉기)를 시도하려했지만 실패하고 핀란드로 도피합니다


'우리에게 빵과 평화를!'이라 연설 중인 레닌


이후 점차 임시정부의 세력이 약화되고, 왕정을 다시 이루고자 하는 군부세력이 강화되었죠.

이후 군부였던 코르닐로프가 먼저 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려 하자

당시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카렌스키는 볼셰비키의 트로츠키에게 도움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볼셰비키에서는 적위대라는 강력한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있어서 이 들의 힘을 카렌스키가 잠시 빌리려했죠.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결국 군부의 쿠데타는 진압했지만

결국 레닌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공산혁명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이 것이 10월 혁명입니다.

이후 레닌은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고 최초이자 마지막인 보통선거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 때, 볼셰비키가 아닌 사회혁명당에서 다수의 의원이 나오자

의회를 해산하고, 러시아 공산당을 창당함으로써 러시아의 민주주의 정치는 실패하게 됩니다.





3. 내 생각


레닌 집권 이후 토지 무상 분배, 특권층들의 특권을 약화시키는 등의 많은 정책을 시행했지만

결국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민주정부가 아닌 독재 정부를 지향함으로써 현재의 공산주의 정부의 형태가 완성되었죠.

어쩌면 이 시기 보통선거의 결과에 레닌이 어느정도 승복했었더라면 지금의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미명하에 민중들을 억압하는 1당 독재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듭니다

당시 레닌은 의회 정치가 결국은 자본가들이 다수 의원을 장악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비판하며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엘리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에 의해서 노동자들의 국가를 설립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이러한 주장은 약 3년간의 연합군과 반혁명군과의 전쟁으로 시행하기 어려웠고

결국 그도 급속한 공산화를 포기하고 NEP(New economy policy)라 하여 시장 경제요소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 이러한 러시아 독재는 스탈린에 이르러서 더욱더 강화되었고

2차대전 중에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이라 될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하며 오히려 히틀러보다 더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약 70만명+A)

하지만 스탈린 시기의 국가주도의 계획 경제가 경제 공황시기에도 빛을 발하자

미국에서는 이 국가주도의 계획경제 정책을 소련으로부터 어느정도 수용하여

수정자본주의를 완성하였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참 역사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최초의 민중혁명이지만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했던 러시아 혁명.

물론 많은 의의를 갖고 있지만 여전히 공산주의 하 1당독재체제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억압받는 다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면이 큰 혁명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역사는? 2월 22일(독도 강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