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은 2월28일입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228운동 바로 2.28의거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라 칭해지는 2.28의거!
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배경
315부정선거가 있기 전 조병옥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이에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이 민주화 진영에서 대통령급 위상을 갖게 되는데요!
이 때, 이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구 수성구에 2월 28일 일요일에 연설을 하는 일정이 잡혀져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대구는 반 이승만적인 젊은 학생들이 정말 많았고, 자유당의 독재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는 이 들이 장면 유세 현장에 나타날 시에 언론의 주목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학생들이 장면 유세장에 나오지 못하도록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합니다
이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자, 고등학교에서는 갑자기 임시 시험을 친다는 말이나 또는 단체 영화관람을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강제로 학교에 오게 했습니다
이 때, 자유당의 꼼수를 간파했던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아래와 같이 오치며 가두시위를 시작합니다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그리고 이에 호응한 다른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도 27일 시위를 벌였습니다.
2. 전개
2월 27일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집에 모인 대구고, 경북고,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아래와 같은 결의문도 작성했습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떄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출처: 위키백과)
그리고 2월28일 학교에 모인 학새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를 일으키며 궐기합니다.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반월당, 중앙로를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생들이
합류를 했고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때는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장면 유세장에 나타난 학생들 이에 대해 오림근 경상북도지사와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종북몰이
를 시전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오히려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보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는 등
학생들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결의문을 읽는 이대우 학생 결과적으로 이 시위엔 8개 학교 총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12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학생들도 계속된 시민들의 요구에 곧바로 석방되었다고 하네요. 이 의거는 언론에서 보도되어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의거는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으며 이후 419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3. 내 생각
419의거를 주도했던 김주열 열사 한국사 현대사를 자세히보면 우리나라를 바꿔왔던 것은 학생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주도하여 시작을 하고, 이에대해 성인들이 합류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부산대학생들이 주도한 부마항쟁 419혁명도 그렇고, 부마항쟁도 그랬으며 6월 민주항쟁도 그랬습니다.
6월 항쟁
부마항쟁에 참여한 부산대 학생들 아마 가장 순수한 시기고, 정의라는 단어에 대해 가장 순수하게 인지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의 직업에 대해 약간의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투사를 내가 육성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 친구들에게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평소에도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있는 중입니다. .
한국은 위기의 순간 교육을 통해서 극복하였습니다
근현대사에서도 국망 이전에 수 많은 학교가 들어섰으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제일 먼저
탄압했던 곳도 학교, 서당이었습니다. 그 만큼 교육의 영향력은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정의를 지키고자 했던 60년전의 젊은 학생들의 혈기를 기리며
이번 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