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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Feb 28. 2022

젤렌스키 대통령이 대단한 이유(Feat 선조, 고종)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이 계속 진행 중입니다.


현재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5km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크라이나 수도의 함락을 걱정하는 언론이 연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제2의 도시라 불리는 하리코프시엔 이미 러시아군이 진입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현재 하리코프에 들어선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시가전을 벌이는 중이며 상당히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격렬하여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진입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사실 병력양으로나 무기 수준을 봐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세계 국방력 2위의 러시아를 이토록 곤경에 빠뜨리게하는 요인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보았고,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1.우크라이나 민들의 애국심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민들이 피난 중입니다. 근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 노약자라고 합니다. 물론 우크라이나 국가에서 국가 총동원령을 실시하여 강제 징집된 경우도 많지만 중요한건 자원입대자가 13만여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군사 훈련 중인 고령의 우크라이나인

이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얼마나 고국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현재 남부 지역에서는 러시아 기갑부대의 진군을 막기위해 우크라이나의 한 장병은 폭탄을 갖고 자폭하며 다리를 무너뜨렸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자원입대 중인 우크라이나 여군

뿐만 아니라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해협 부근에서 러시아 전함을 막아섰던 작은 섬 즈미니 섬의 국경수비대원 13명의 일화가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들에게 먼저 러시아 전함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유혈사태와 불필요한 살상을 피할 것'이라고 압박을 했습니다. 그러자 국경 수비대에서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즈미니섬



꺼져라



그리고 13명 모두 전사하였다고 하네요. 얼마나 모국을 지키고 싶은 의지가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책임있는 지도부


사실 장관들의 세세한 내막까지는 모릅니다. 다만 정말 인상깊은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행보입니다.

전쟁 하루 전 단결의 날을 선포한 젤렌스키 대통령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16일을 '단결의 날'로 선포하고 모든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며 국민들의 결속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나서 시종일관 수도 키예프에 머물며 여전히 우크라이나에서 국민들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단결의 날 집회를 하는 우크라이나인들.


사실 미국에서 러시아의 제 1표적이 젤렌스키 대통령이란 것을 알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피난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아래와 같이 남깁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피신을 위한)승용차가 아니라 탄약이다





사실 이 이전까지의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우크라이나 자국 언론에서의 비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나토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했지만 러시아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모하게 나토에 가입하려고 했던 행보에 대해서 우크라이나 언론의 많은 비판이 있었죠. 하지만 저는 이 대목도 좀 이해되는게 만약 이대로 계속 유지되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영토의 반이 러시아에 자연스럽게 귀속되었을 겁니다. 크림반도를 2014년에 러시아가 병합한 이후로 우크라이나 내에 친러 세력이 많이 형성되었고, 문제의 돈바스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약 1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기위한 내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고, 어찌보면 나토 가입은 젤렌스키 대통령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지였을 수도 있습니다(물론 너무 급진적이었던 면도 있지만)

어쨋든 그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했고, 전쟁 이후에도 피난가지도 않고 국민들을 독려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도 키예프에서 떠났다는 거짓 언론을 퍼뜨리자, 그는 동영상을 공개하여 그가 여전히 수도 키예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인터뷰를 조금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기를 놓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지키고 있다. 우리의 무기는 진실이고 우리의 진실은 이것은 우리의 나라이고,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지킬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사실 조국을 수호하는 것은 젤렌스키만이 아닙니다. 프로셴코 전 대통령은 원래 폴란드에 법적 문제로 망명을 했다가 지난달 말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자 조국을 지키겠다며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리에 나가 총을 들고 인터뷰하면서 얼마나 버티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소총을 들고 있는 프로셴코 전 대통령



영원히



라 짧게 답하였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소총을 들며, 전선으로 나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렉시 곤라첸코 우크라이나 의원이 예비군으로 자원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실 군 복무 경력이 없기에 예비군, 또는 방위군으로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지만 예비군에 기어코 들어가 조국을 수호하겠다고 했습니다.











3. 한국 통치자들의 빤스런 행보


선조(출처: 불멸의 이순신)


솔직히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와 반대 같아서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현명한 민중들과 우둔한 정치인들이 있었던 시기가 많았습니다. 과거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것도 모자라, 명나라에 입국시켜달라고 계속 요구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의병장들도 죽여버리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이순신, 고경명) 전쟁 사기만 낮추는 너무도 무능한 군주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은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어있는 대한제국임에도 불구하고 을사조약이라는 치욕스러운 조약에 대해서 책임지고 거부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맡기고 도망칩니다. 마치 자신의 아내가 죽었던 날, 자신의 구차한 삶을 살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빤스런한 사람다웠지요. 그리고 그는 국망 이후에도 무려 9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제국이라는 호칭에 맞지 않은 황제였고 무능한 군주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주장합니다






우리는 3일 내로 평양을 점령할 수 있지만 미국의 경고 때문에 참고 있다.(1949년 9월 30일)



그리고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 역시 바로 대전까지 빤스런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래와 같은 방송을 대전에서 합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피난민 1호입니다. 원래 대구까지 피난을 갔었는데 각료가 '각하 너무 멀리왔습니다'라하자 대전으로 다시 올라가는 웃지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6월 27일 대전에서 이승만 대통령 특별담화(대전에서)





그리고 6월 28일 한강다리를 폭발합니다. 그리고 이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돌아왔을 때, 김창룡 중령으로 하여 인공치하기간 중 부역자 색출을 해라는 명령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말을 듣고 서울에서 남아있던 시민들을 부역자, 빨갱이로 지목하여 대량 학살했던 것입니다(55,915명 감금, 1,298명 처형)

6월 28일 한강다리 폭발로 약 8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4. 내 생각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국가 통수권자가 갖고 있는 상징성과 실제 권한도 아직 강력합니다. 특히 군통수권자이기도 한 대통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 러시아는 3일만에 초단기로 전쟁을 종결시킬 생각으로 3일분의 식량과 군물자를 준비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지금 물자부족으로 고초를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국의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 휘하 각료들. 그리고 애국심 넘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보면서 정말 생각나는게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현명한 민중들과 우둔한 군주가 난세를 맞이하였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선조는 무능했지만, 자원하여 들고 일어난 의병으로 인해서 왜군들은 식량 보급로가 끊겨서 전쟁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민중들을 무시하고 마지막까지 미국등 선진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지만 민중들은 외세를 믿지않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나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이 들의 의병활동은 이후 만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승만 정부시기 부산으로 도망갔던 이승만이었지만, 유엔군의 도움과 국군 장병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수도를 탈환하고 이렇게 다시 38도선 이남의 국경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난세에 현명한 민중들의 힘으로 버텼었던 것이지요...





내일은 3.1절입니다. 없던 나라를 되살리고자 했던 수 많은 민중들의 염원이 있었던 시기. 지도부 33인은 스스로 체포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지만 가장 순수하고 가장 열의있게 움직였던 민중들. 그 들의 숨결이 녹아 숨쉬는 3.1일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국난 시기에 일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애국심을 볼 수 있어 너무 감동했고 눈물 겨웠습니다. 부디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염원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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