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5곳에 걸쳐서 약 1,000명의 기생들이 모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두시위를 했습니다.
3월 19일에는 경남 진주에서 기생독립단이 1만여 군중의 만세운동 속에서 같이 남강에서촉석루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3월 31일 안성조합 기생들의 만세운동에 이어 4월 1일에는 황해 해주군 종로에서 해주 기생 10여명이 3천여명의 만세운동에 합류하여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전국의 기생 3413명 중 1,000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당시 기생은 천인 신분에 가까웠었습니다. 하지만 그 들 역시 조선인이었고, 식민지 체제 하에서 식민지인들이 겪는 슬픔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기생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2. 조선인 형사 3.1운동 준비과정을 목격하다
3.1 운동 직전에 천도교측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도중,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이 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민족 대표 중 한 명인 최린이 신철을 만나 돈을 주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사람이냐?'라 묻고는 '며칠간 입을 다물어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신철은 이를 묵인하였고 3.1운동은 예정대로 일어났다고 하죠. 이후 신철이 묵인한 것을 안 일본 경찰에서 신철을 체포를 했고, 신철은 유치장에서 숨겨뒀던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신철을 설득한 최린은 이후 친일파가 되어 조선인들을 일본인화 만들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3. 진짜 민족 대표 역할을 했던 강기덕 선생님
원래 민족 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주도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당초 무슨 이유인지 탑골공원에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자기들끼리 낭독하고(-_-) 경찰에 자수를 합니다. 하지만 탑골공원에는 예정대로 시위에 참여하고자 했던 수 많은 민중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죠. 이에 시위가 무산될 수도 있는 시기 연희전문학교의 강기덕 선생님은 이 들 민족대표33인을 찾아가서 왜 탑골공원에서 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들을 설득하는데 실패를 하였고,
결국 자신의 후배 정재용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탑골공원에서 대규모 민족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태화관에서 자수한 민족대표 33인이 아닌 강기덕 선생님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46년 31 절 기념일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정재용 선생님
그리고 3월 5일(2차 시위라 합니다)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를 총지휘하였습니다. 5천 명의 군중이 모인 시위 현장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대형 인력거를 탄채 나타나 독립만세를 외치며 수 많은 인파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일본제국 경찰의 칼날을 이마에 맞고 쓰러져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했습니다.
이후 그는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혀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원산총파업 기간 동안 노동자, 사회주의 지도자, 민족지도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한국 최대 좌우 합작 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11월 9일 신간회 중앙집행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친일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결국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였고, 그의 소신대로 신간회는 해소됩니다. 그 이후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여 친일파로 변모하였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변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에는 반탁운동에 참여하다가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농립부 장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여운형이 피살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납북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4. 내 생각
3.1운동은 약 110만명이 참여했고 212개의 군에서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에도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내용이 있지요. 하지만 이 3.1운동은 지식인, 엘레트층만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감된 사람의 50%가까이가 이름 모를 농민들이었습니다.
3.1운동 중 수감된 사람들 구성 비율.
이 밖에 학생, 지식인, 농민, 노동자, 상인, 상공인, 기생, 무직자등 거의 모든 계층에서 참여했던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이 3.1운동 이후로 외교론을 주장했던 국내의 지식인들 중에는 상당부분 '자치론'이라 칭해지는 친일 운동으로 변절되기도 했지만,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을 보고 감화를 받은 많은 지식인들이 이 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직할지에 대해 연구한 결과 사회주의계로 많이 빠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독립운동 당시 사회주의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들을 조직화하였고, 1920년대에는 임금, 지대 투쟁등의 생존권투쟁을. 1930년대에는 일본의 식민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명적 농민, 노동조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 뿐만 아니라 3.1운동을 계기로 효율적인 민족운동의 지도를 위해 임시정부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대한민국이 계승하고 있지요. 한 마디로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신은 3.1운동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무력통치 아래서도 끝까지 민족문화를 수호하고자 했고, 굴복하지 않았던 민중들. 그 들이 일으켰던 3.1운동. 오늘은 3.1운동이 일어난지 103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공부해오면서 한국의 민중들만큼 의식이 높은 곳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대표적인 사례를 3.1운동이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의 자유주의 국가에 있게끔할 수 있었던 동력이 아마 이 3.1정신, 자유를 추구하고, 억압에 저항했던, 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 3..1운동 때 순국하신 열사들을 추모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