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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Mar 09. 2022

오늘의 역사는?3월9일(한무제)


오늘은 대선이 있는 날이죠!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 꼭 행사하시길 바랍니다!


3월 9일 오늘은 과연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요?


바로바로!

중국의 대표적인 전제황권을 구축한!


한무제가 즉위한 날입니다!


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즉위 당시의 상황



중국 한나라는 초기 상황은 굉장히 불안정했습니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할 당시 건국 공신 세력이 워낙 강하였기에


중국사 초반 특유의 건국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한신

이 과정에서 한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한신을 제거하죠(토사구팽은 여기서 생긴 말입니다)


그리고 유방은 자신의 성씨인 유씨로 제후왕(영토를 나누고 소국에 행정권을 맡은 사람)을 임명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제후왕들의 세력이 커져가자 문제, 경제에 이르러 이 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강간약지정책(제후왕들의 영지 및 권한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반발하여 경제시기 제후왕들이 연대하여 오초 7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 것을 주야부의 활약 속에 진압을 한 이후 경제는 대대적으로 제후왕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습니다.




2 무제의 즉위

한무제

무제 역시 이런 맥락 속에서 즉위를 합니다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좋은 상황에 놓여있었고


이 찬스를 놓지지 않죠 그는 '추은령'이라하여 은혜를 베푼다는 명분 하에 제후왕의 영지를 제후왕의 아들들


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게 함으로써 제후왕들의 영지를 축소시켰습니다(당시는 적장자 상속의 원칙이라 영지


유지하였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금령이라하여 한무제가 제사에 바칠 황금을 제후왕에게 요구를


했는데 이 황금의 질과 양이 만족스럽지 못할 시에 제후왕을 처벌까지 하는 등, 황제의 권력이 갑자기 비대해


지게 니다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무제

그리고 아당율, 좌관율, 부익률등을 통해서 제후왕들을 거의 직접적으로 통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자사라는 관리를 제후왕을 관찰하고 지방을 관할하기위해 파견함으로써


이로써 한나라는 수도 부근만 다스리고 지방은 봉건제를 유지하던 군국제에서


모든 영토를 황제가 임명한 관리로 다스리는 군현제로 변경되게 됩니다.


그리고 관리조직도 기존에 3공 9경의 체제, 승상 위주의 정치에서


황제 바로 아래에 있는 내관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함으로써 (상서, 중서) 황제권은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황제권이 중앙집권화되기에 이르렀죠!





3. 대외원정

흉노인상이 새겨진 중국의 동계부조


그는 황제권을 강화한 후, 본격적으로 대외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사실 이전까지 주변국가에 수세적으로 몰리기만 했던 한나라였기에


대외적 안정은 필수였었습니다


국초에 한고조 유방은 흉노 원정을 단행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흉노와 화친하여


종실의 여자를 출가시키고 금, 은, 비단 등을 보내어 흉노의 환심을 사는 화친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어 즉위한 문제, 경제 시기에도 흉노를 정벌하고자 단행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한무제 시기 대대적으로 흉노 정벌을 단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위청과 이광리, 곽거병 등을 파견하여 흉노정벌을 시도하였고( bc129)


bc119년에 이르기까지 수십마네 달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연속으로 보내어 흉노를 외몽고 지역으로 쫓아내


는데 성공합니다. 결국 서역 4군을 설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조선 정벌, 남쪽으로는


남월을 정복하기까지 이르러 고비사막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기까지 당대까지 중국사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


를 구가하게 됩니다 .






4.그 이후의 여파



한무제는 대외 정벌을 너무 지속적으로 추진한 나머지


지나치게 재정을 낭비하였습니다


이에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상홍양, 공근등을 등용하여


소금과 철을 국가 주도하에 전매제도를 실시하게 하였고


평준법, 균수법등의 상업통제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통제 경제 정책으로 성장한 관료 세력인 외조와 황제권 강화 과정에서 성장한


측근세력인 내조 간에 무제 사후 통제경제 정책에 대한 존폐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을 하다가


결국 내조의 왕망이 권력을 잡고 신을 건국하여 전한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5. 내 생각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현재를


통찰함으로써 과거의 역사는 숨쉬게 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무제가 중국사와 동아시아사에 영향을 미친 바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흉노를 정벌하기 위한 동맹국을 주선하기위해 파견한


장건


장건에 의해 비단길이 개통되어 동서교역이 활성화되었으며



고조선등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한나라의 문화를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써







비단길 개통으로 동서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동아시아는 한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한자, 불교, 유교, 율령)


하지만 그의 지나친 대외정벌과 토목공사등으로 재정을 많이 낭비했고


이 재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지나치게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경제가 안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신흥 호족들을 양상시킴으로써 빈부격차가 심화하게 되었습니다.


유교를 장려했지만 오히려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혹리들을 양성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사회는 폐쇄적으로 되는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전한은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외형적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였지만, 내실을 튼튼하게 하지 못하여 전한의 멸망을 야기했던 한무제


중국사와 동아시아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가 죽은 후 얼마 못가 황위를 왕망에게 넘겨줌으로써 제국은 유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도 같은 것 같습니다... 외양을 너무 중시하다보면 자기 자신이 점차 없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한국식 유교 문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하고 싶어하고 사회 트렌드에 맞는 그 것'보다는 '자기 내면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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