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소년 Mar 18. 2022

오늘의 역사는?3월18일(미국문화원방화사건)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무엇일까요?


바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입니다! 이에 대해서 알아보시죠!





1. 배경


1980년 대한민국에서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납니다


헌정사상 현직대통령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2스타 전두환이 4스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에 시민들은 다시 군인들에의해 독재가 유지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서울역 앞에 모인 시민들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고 하지요....



전라도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남대를 중심으로 해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고



5월17일 평화적으로 시위는 협상을 통해서 종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불처럼 번져가는 민주화 요구에 대해 통제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타겟을


광주로 삼은 후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게 되죠.... 이 때 시민들은 전라남도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도청 사수에 실패하고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청을 계엄군에 내주게 됩니다.


문제는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믿었던 것은 미국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니 쿠데타를 통해서 수립된 신군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고, 미국이 보냈던 항공모함은 북한의 남침에 대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시민들이 실망감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그리고 그 해 12월 이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2. 최초의 반미시위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주도했던 것은 가톨릭계 사회운동가였습니다. 이 들은 광주의 영혼,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좀 더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동자 임종수, 정순철등은 붙잡혀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3. 부산 미국문화원방화사건


그리고 2년 후 다시 한 번 더 반미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2의 수도라 불리는 부산에서 일어났습니다.


1982년 3월 18일 오후, 문부식, 김은숙, 김현장등의 주도하에 아래와 같은 말을하며 부산 주재하(동아대)에 있는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릅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이 방화로 인해서 동아대학교 학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이를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언론 보도하여 여론 몰이로 이용했습니다. 결국 이 화재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모두 88년 민주 항쟁의 성공 이후에 석방되게 됩니다.





4. 의의와 평가



이는 한국 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인 반미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한국 내에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파악하기 시작했고 완전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를 가진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이제 부터는 제 생각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는 필자의 견지하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과연 이 분들은 자신들의 원래 의도였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드높였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A에게 받은 것은 A에 대해서 갚아야 맞다고 봅니다. 물론 광주 민주화 운동 시기 시민군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은 참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모든 언론이 통제되어 있었고 이후에 밝혀지기로는 계엄군에서 미국 정보망까지 모두 포섭하여 미국에서조차 진실을 알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아쉽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기고, 문제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5공화국에 의해서 자행되었던 인간 살육은 당연히 5공화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져야 했고, 그 것은 당연히 합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가장 돈독한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상대로 자칫 외교적 결례를 남길 수도 있는 행동을 대학생들이 이행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숙되지 못한 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방화 도중에 죽은 대학생은 무슨 죄인가요.... 그 들은 과연 명분이 정당했다고 생각했는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들이 민주투사임을 알려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는지 궁금합니다.... 조심스러운 제 주관이었습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찌보면 정말 큰 곤경에 쳐할뻔도 했었고, 또 다르게 보면 광주의 정신이 여전히 대학가 내에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이러한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에 광주의 정신은 6월항쟁

으로 종결이 됩니다.


직선제를 이루고 문민정부를 이루고, 평화적 여야교체를 이루는 등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후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어쩌면


꼭 필요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그렇다고 범죄자의 범죄행위, 최악의 사건들등 보편적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 옹호할 생각은 일도 없습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사회를 기원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