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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Apr 07. 2022

오늘의 역사는? 4월6일(간디의 소금행진)

위대한 혁명가 간디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바로!



간디의 소금행진입니다!



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간디

간디는 상인 출신 계급(바이샤)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높지 않았던 계급에서 태어났던 그였기에


일찍부터불평등이란 개념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어떤 곳에서는 바이샤 계층도 지배계급이라 칭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는 18살 때 사말다스 대학에 갔는데 수업 내용이 어려워 그만두고


영국 유학을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1891년 변호사 면허를 취득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생계 유지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2. 그러던 어느날

남아프리카 뭄바이엣 변호사로 개업을 하여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문제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분야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확인했던 것은 당시 약 7만 명의 인도인들이 남아공으로 이주했었는데


이 들이 남아공에서 학대를 받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하고


1914년까지 활약을 했습니다.




3.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다


그는 아힘사(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이란 철학을 중심으로하는 간디주의적 이론에 입각해서


인종차별과 영국의 압제에 대해서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1914년에는 영국의 차별법에 저항하였다가 구속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1차대전에서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켜준다는 약속을 지켜주지 않고 롤라트 법안등 악법을 제정하


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사티아 그라하: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의 일환으로서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대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









3. 소금투쟁(단디 투쟁)

간디는 1930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1929년 인도의 완전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대대적인 반영운동을 벌였는데요.


이 것이 당시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자 동시에 영국이 당시 창설하였던 소금세란 부정당


한 과세에 대한 저항이란 의미에서 소금투쟁이라하기도 합니다.


그는 약 아쉬람이란 곳에서 70명의 동지를 이끌고 출발하여 24일을 걸어서 구자라트주의 단디에 도착하였


습니다(무려 390km행진)


그리고 도착한 후 바닷가의 소금을 취하는 모션을 취함으로써 영국의 소금세에 반대한다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이 때 간디의 행렬에 점차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후 영국이 탄압하는 과정에서 무려 6만명의 사람들을 투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은 이듬해 소금세를 철폐하였다고 합니다.


소금행진 기념 동상




4. 그의 죽음


그는 이후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대적으로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허용합니다.


하지만 인도엔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다수의 힌두교자와 절대 적지않은 수의이슬람교도들이

섞여있는 문제였습니다ㅣ. 간디는 1947년 힌두교, 이슬람교도들간의 종교적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분할이 거의 공식화되어가자 마지막까지 힌도, 이슬람의 융화를 도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5. 그의 활동에 대한 의의

경남 김해에 세워져있는 간디 동상

그는 지난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함 '지난 1000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투쟁이 선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UN에서는 10월 2일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세계 비폭력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6. 그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



그에 대한 비판이 너무너무 많아서 몇가지만 소개합니다.



1) 그는 영국 총독을 기차에서 폭살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총독이 신의 가호로 살아난 것에 감사'라 하였음.



2)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국의 청년들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함께 싸워줄 것을 호소하였음. 그리고 이후 아무것도 얻지못함


(마치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1930년대 일제시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던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음)



3)그가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했으나 카스트제도 폐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함.



4)그는 힘없는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생활 개선에 필요한 요구를 하지 않았음(임금 향상 및 지대 인하)





제 글은 여기까지 입니다!! ㅎ



다음에는 더욱더 유익한 글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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