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잇님들!
갬성입니다!
오랜만이지요?
오늘은 4월 7일! 오늘의 역사는 무엇일까요?
바로!
독립신문 창간일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독립신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한 많은 피터손 드디어 귀국하다.
피터손은 서재필의 영문자 이름입니다. 그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이 때 국내에서 그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는 음독자살을 했고, 자신의 동생은 참형에 쳐했으며 2살짜리 아들은 굶어 죽게됩니다. 그런 그는 조선에 대한 미련은 버린 채, 미국에서 의원을 개원하는 등 정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895년 갑오경장이 있었습니다. 이 때 이 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서재필에게 귀국할 것
을 부탁합니다.
이에 서재필이 돌아오게 됩니다.
(아마 위의 사유 때문에 서재필이 고종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으로 공화정을 주장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2. 창간
독립신문의 창간은 서재필의 귀국과 함께 하였습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계몽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었
던 독립신문은 점차 조금씩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신문은 한글로 되어있어서 사람들이 읽기 좋았기 때문에 그만큼 인기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독립신문은 이후 창설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당시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에서 '나라를 살리자'는 의미의 독립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기 시작하였고, 많은 대중들이 만민공동회 및 여러 계몽운동에 참여토록 유도한 좋은 매개가 되었습니다.
3. 쇠퇴
하지만 사실 독립협회 자체가 내부 분열이 많았기에 독립신문 역시 그 존폐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서재필의 경우 미국과 같은 공화주의를 지향한 급진주의자였는데 이 들은 점차 독립 신문을 정부 정책
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고, 이에 위기를 의식한 고종이 서재필을 다시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독립 신문은 국가 정책에 대한 홍보를 톡톡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팔랑귀이신 고종님께서 수구 대신들의 간언에 넘어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지향한다는 거짓
음모론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를 황국협회란 보부상조직을 통해서 해산시켰으며 몇
달뒤 독립협회 또한 정부 기관지로 흡수시킴으로써 없어지게 됩니다.
4. 그 후
이승만의 탄핵을 알린 임시정부판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이후에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서 창간됩니다.
그 주필은 박은식 선생님과 이광수로서 독립운동에 대한 여러가지 소식을 알렸습니다.
5. 한계
독립신문은 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창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계몽운동의 일환답게 민중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민중들은 굉장히 우둔한 존재들이며 이 들을 계몽시켜야 한다는 입장에
서 민중들을 바라봤습니다. 고로 의병전쟁과 연대할 수 없었지요.
만약 연대된다 하더라도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꿈꿨던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입헌군주제 내에서는 아마 여전히 어느정도의 신분을 허용하는 국가의 형태였을 것이라 예상이 됩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즐거운 하루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