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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Apr 13. 2022

오늘의 역사는? 4월14일(임진왜란)


반갑습니다 잇님들!갬성입니다


오늘은 블랙데이죠? 하지만 동시에 링컨대통령이 암살되기도 한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4월 14일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 사건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임진왜란입니다!



오늘은 4월14일! 바로 임진왜란 개전일입니다! 이에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배경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 거의 100년만에 통일한 것이었고, 사실은 그 통일마저도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정복이 아닌 항복의 형태로 병합을 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 들의 힘을 빼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과거부터 중원 대륙을


정벌하겠다는 헛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조선에 '정명가도(중원을 칠 수 있게 길을 비켜달라)


는 말은 허구가 아닌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전쟁을 통해 다이묘들의 힘을 빼놓아 자신이 이룩한 전국통일을 좀 더 완전히 할려했었고,


동시에 이 들의 불만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으로 조선과 중원을 정벌하고 그 들의 땅을 뺏어 다이묘들에게


나눠줄 것이라고 이야기했었죠!



이에 반해 조선은 전쟁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15세기 사림들이 집권한 이후 나라의 명운이 흔들렸다고 보는데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태종 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세계지도가 만들어지고,


세종시기 신숙주를 보내 일본을 염탐하게 하는 등 대외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던 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대부분의 무기들(판옥선, 화차)등은 조선전기 문종에 이르기까지 어느정도

 만들어졌던 것이었습니다(물론 판옥선의 경우 명종에 이르러 최종 확정됩니다)



하지만 사림이 집권한 후 자신들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재상정치를 이룩하겠다는 명분하에 왕권을 약화시키고, 왕의 지위를 자신들과 거의 동등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특권은 강화시키고(군역 면제, 전리사변형-국경 근처로 쫓겨나는 형벌-등의 징벌 면제등)


붕당을 이뤄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 시작합니다(저는 개인적으로 붕당이 세력 균형 하에 견제와 균형이란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사대는 더욱더 강해졌고, 일본에 대한 정탐은 약해지고, 실리적인 과학기술은 더욱더 경시되었으며 신분제는 더욱도 공고해지고, 양반들의 특권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던 와중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악화되었고, 방납의 폐단에 이어서 군역의 문란까지 이어져 그 누구도 군대에 가려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군대가 개판이면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겠습니까. 그만큼 쓸만한 군대가 전무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약한 사회 기강은 개전 초기 조선이 떡실신 당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2. 내용


대마도주가 그토록 경고하였던 일본의 침공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다가


결국 1592년 4월 일본은 상륙하고야 맙니다. 경상좌수사 원균과 우수사는 모두 이를 막지않고


달아나버리고, 일본군이 그대로 상륙하게 도와줍니다(그 와중에 원균은 자신의 배를 모두 없애버리는 클라스를 자랑하죠.)


이를 용감히 막았던 정발장군, 그리고 송상현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충주에서 신립장군의 8천 기병도 잘못된 오판으로 인해서 탄금대에서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에 선조는 빤스런을 하죠.


왜군은 불과 20일만에 파죽지세로 한성에 입성합니다. 한성에는 이미 선조의 피난 소식에 화난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워 없앤 상태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제 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대로 평양성에 진격합니다.


평양성은 강이 흐르고 정말 좋은 명지의 성이었지만 멍청한 평양성 성주는 자신들이 습격하는 루트를 그대로 일본군에게 알려주게 되었고 그 루트를 이용해 평양성을 점령하죠. 평양성을 책임지던 김명원은 멍청하게도 평양성의 양곡을 그대로 두고 빤스런 한 덕분에 왜군에게 거의 1년 넘게 먹을 수 있는 양곡을 선물합니다. 할튼 왕이 멍청하면 그 신하들도 멍청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와중, 9월이 됩니다. 솔직히 일본군은 서울만 점령하면 끝일 줄 알았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선조의 빤스런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죠. 거기다가 9월 조선의 영웅이 등장하지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미 개전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전쟁 전부터 배를 개량하고 수군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 대회를 여는등 군사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전 이후 옥포를 시작으로 당항포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우리나라군사에게 큰 수치감을

안겨주었던 전국시대 7장 중 한 명인 와키자카 야스하루(용인전투에서 8만vs 1천600으로 대승을 합니다)가 이끄는 약 100여척의 전함을 견내량으로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쳐 집중 반포한 결과 79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적장 와키자카는 섬에 숨어있다가 13일동안 굶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 살아났다고 하네요. 일설에 의하면 그가 그 동안 미역을 먹으며 살아갔다고 해서 그의 후손들은 그의 제사 때 미역을 올린다고 합니다.



이 전투 한 방이 정말 임진왜란에 어마어마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일본은


수륙병진이란 전략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육군이 빠르게 올라가는 동안 수군이 남서해안을 통해서 식량을 공급하는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수군이 대패하는 덕분에 평양성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이후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평양성이 함락되는 결과가 야기된 것이지요.



평양성을 함락당한 왜군은 쭉쭉 내려가 한성으로 내려갑니다. 이 때, 명나라 이여송은 또 까불다가 벽제관에서 대판 깨지게 되었고, 이후부터 조선군에 소극적으로 협조하게 되지요. 그 덕분에 아래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와서 조명연합군과 같이 한성을 공격하고자 했던 권율이 일본군 약 3만명에의해 포위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의 수비병력은 3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최신형무기인 화차(다연발 포) 비격진천뢰(수류탄) 의 대활약으로 이를 격퇴시킵니다(총대장이었던 우치다가 이 때 부상을 당합니다)



이후 진주성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일본군은 강화를 맺는데 열의를 다하죠. 하지만 이 때 심유경과 고니시간의 국제 사기단이 조직되어 일본과 명에 각각 다른 조항내용을 전달하였고 이 것이 발각되자 다시 전쟁이 일어납니다(정유재란)



한심한 선조는 조선 최고의 수군 제독이었던 이순신을 파직하고 얼간이 원균을 수군통제사에 두는데요...


그 덕분에 전략에 전짜도 모르는 것 아니냐는 말을 이순신으로부터 들었던 원균의 단순, 무식, 과격한 돌격 앞으로 전략으로 칠전량에서 12척의 배를 제외한 모든 배가 소실되는 세상에서 가장 쪽팔리는 패전을 겪게 됩니다. (선조는 '이 것이 하늘의,뜻이란 말인가'란 한심한 말이나 하고 있었다고 하지요.... 자신이 한 과오에 대해서는 일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다시 삼군수군도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그는 12척의 배를 구하고, 다시 전투에 임하고자 합니다. 선조는 이런 그를 말렸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순신은 너무나너무나 멋진 한 마디를 합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제 2의 견내량으로 선택한 울들목에서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내죠.


적함선 133척, 총 전함 333척에 가까운 적을 12척의 배로 막아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설이 존재하는데요.

사실 안위 뿐만 아니라 여타 장수들도 나가지 않고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말이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혼자서 거의 막았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로 굳혀지고 있죠. 이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울들목의 바다 역류덕분이었습니다. 울들목은 어느 시간부터 갑자기 해류가 역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왜군에게 순류였던 바다가 어느 시점부터 역류로 변하면서 이순신의 포탄에 맞고 두둥실 떠내려가는 폐기물이 된 왜군 전함에 다른 전함이 부딛혀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렇다고 뒤에있는 선박들도 다시 뒤로 가기엔 (세키가네 배는 직진은 잘해도 회전, 유턴, 후진이 안됩니다) 늦어서 자기들끼리 난리 부루스를 치다가 그냥 패하게 된 전쟁이었습니다. 전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하늘이 도왔다




하늘이 도왔다. 하늘의 뜻이다란 말은 이럴 때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선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어느정도 노력한 후 해야하는 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후 일본은 순천, 남해등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대기타다가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수합니다. 노량에서 그 들을 마지막까지 섬멸시키고자 했던 이순신장군은 마지막 자신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요.






3.결과


정말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전체를 바꾼 전쟁이었습니다. 조선은 이 전쟁으로 인해서 인구가 3/2로 줄고 문화재도 약탈, 방화되었으며 토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지대장, 호적, 그리고 신문제 관련 문서가 모두 불타서 사회혼란이 야기되었지요.


하지만 집권자들은 이 중에서 신분제 혼란에 더 눈을 들여서 신분제 혼란을 막기위한 성리학의 교조화의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이후 히데요시 계열의 미쯔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간의 전쟁이 있었고 이 전쟁(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건설합니다. 이에야스는 전쟁 중에 데려온 조선인 도공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지금의 도자기 대국에 이르게 하였고, 이황의 제자 강항을 포로로 데려온 후, 강항에게 일본인 학자들을 수학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들은 일본 내에 성리학이 뿌리잡히게 했지요. 그리고 이 들을 중심으로해서 일본에는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실시됩니다(막번체제)



그리고 명은 멸망에 이릅니다. 조선에 파병한 사이 만주족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고 그 틈을 이용한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8기군을 바탕으로 후금을 건국합니다. 명과 후금과의 대전쟁에서 (사흐르전투) 후금은 대승을 거뒀고 아들 홍타이치, 그리고 손자 순치제에 이르러 결국 명을 완전히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4. 의의


역사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됩니다. 일본은 300년을 단위로 한반도를 공격했습니다. 고려말 왜구로,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그리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이렇게 그 것이 실현되었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한반도를 병합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비슷한 양상이 반복된다는 것을 몸소 겪고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차리지 못한 조선 위정자들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왜란 말고도 삼전도 굴욕이란 치욕을 맞보고도 조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과오가 성리학의 교조화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훨씬 더 성리학을 강화함으로써 자연과학이 쇠토하고 결국 국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조심스럽게 이 얘기를 합니다


'어제와 똑같이 행동하고도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정신병이다'



어제와 똑같은, 300년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국제 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조선은 멸망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현재 갖고있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해결하셨습니까?



만약 해결하지 못했다면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를 통해 보는 실생활 교훈이었습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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