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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Jul 21. 2022

오늘의 역사는? 7월21일( 벨기에 독립)


#벨기에독립 #네덜란드 #영국 #빈체제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벨기에 독립입니다. 




1.상황


유럽은 1800년대 그야말로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식민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제정을 실시했습니다. 이후 제 3차 대불동맹(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을 박살내고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을 정복하기에 이르는데요. 하지만 러시아 정벌을 실패하고 프랑스와 나폴레옹의 영광은 끝이 났습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하지만 나폴레옹의 영광은 끝이 났지만 자유주의의 전성기는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라이프치히 제국민 전쟁에서 프랑스의 자유주의, 우수한 민주주의 문화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유럽 각 국의 병사 및 청년 장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민족주의, 자유주의 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의 난입니다. 청년 러시아 장교들이 일으킨 난으로서 러시아를 입헌 군주제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탄압당했쬬.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 민족주의의 물결을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체제가 빈 체제입니다. 빈체제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는 '복고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며 동시에 보상주의에 입각해서 나폴레옹 이전의 상태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에따라 프랑스는 루이 18세가 복위를 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이태리 베네치아를,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를 그리고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즉 벨기에를 획득했습니다. 



빈체제를 주도한 메테르니히 









2. 당시 벨기에 사람들의 불만


벨기에 사람들은 일단 네덜란드의 통치 자체가 불만이었습니다. 이 들은 종교도 달랐고, 언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교(기독교)가 다수였던 네덜란드와 달리 오랫동안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은 벨기에가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죠. 당시 벨기에는 네덜란드보다 인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의회 의석 수가 동수였습니다. 이는 인구비례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죠. 비슷한 상황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 3신분층이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음에도 100/100/100명씩 신분별로 대표를 선정한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북부 출신 의원들이 기득권을 가진 채 의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고 갖가지 경제 정책등이 네덜란드에 집중되어 버립니다. 당시 네덜란드의 경우 산업혁명이 이제 막 시작되어 산업 발달을 위한 정책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데요. 이에 따라 농업이 주 생계 수단이었던 벨기에 지역의 사람들에게 불리한 정책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공업 성장을 위해서 관세를 낮춰버리는데요. 이에 따라 값싼 곡물이 대거 수입되면서 벨기에 지역에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죠. (수입-> 곡물 양 증가 -> 곡가 헐값-> 농민 경제 악화) 



여기에다가 국왕 빌럼 1세는 1823년 공식 언어를 네덜란드어 하나만 지정해버립니다. 당시 벨기에 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였기에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1830년 6월 네덜란드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것은 폐지되었습니다. 이 밖에 언론의 자유, 교ㅕ육의 자유, 내각 책임제 적용등이 행해지지 않는 등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결국 벨기에 주민들이 폭발하게 되었죠. 






3. 극장에서 일어난 혁명! 


당시 옆나라 프랑스에서는 샤를10세의 전횡에 맞서서 의로운 국민들이 일어납니다. 이를 7월 혁명이라 하는데요. 이에 고무받은 벨기에 국민들 역시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증폭되고 있었죠. 그리고 8월 25일 빌럼 1세가 주관한 축제 도중,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가 상연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나폴리 시민들의 자유주의 운동을 다룬 내용이었는데요. 이를 본 벨기에 시민들이 폭발하게 됩니다. 


자유 만세! 프랑스 만세


이렇게 우발적으로 시작된 벨기에 혁명.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이에 네덜란드 빌럼 1세는 이를 진압하려 했찌만 결국 패퇴하고 맙니다. 그리고 10월 4일 벨기에인들이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들은 독립 선언은 다수 열강들의 동의를 받고 결국 1년이 지난 1831년 정식으로 벨기에 왕국의 독립이 승인되죠. 초대 국왕은 레오폴트 1세로서 레오폴트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 독립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독립은 벨기에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동시에, 영국등 네덜란드의 성장을 견제하는 나라들이 벨기에 독립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1831년 벨기에, 네덜란드 지도(출처: 위키백과) 




4. 내 생각


소수 민족의 독립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듯 합니다. 벨기에 역시 에스파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등 강대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고 있었고, 1831년이 되어서야 독자적인 국가로 인정받게 되죠. 이런 독립의 과정들을 보면 항상 그 안에 민중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벨기에 독립을 주도했던 것은 벨기에 국왕도 아니었고 민중들이었습니다. 민중들이 기반이 되어 일어났던 것이 벨기에 혁명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역사를 민중들의 역사라고 칭해지는 것 같습니다. 





브뤼셀에 도착한 샤를 로지에가 이끄는 리에주 의병





오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은 더 알찬 포스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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