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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Jul 21. 2022

오늘의 역사는? 7월12일(사도세자의 죽음-임오화변)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사도세자의 죽음입니다!





1.생애 


장조대왕, 사도세자의 어전


사도세자는 영조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형 효장세자가 일찍 죽자 그는 영조의 총애 속에서 컸는데요. 그는 무려 3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그가 성장하면서 학문이 아닌 그림과 같은 기예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1757년 22살에 이르렀을 때, '무기신식'이란 책을 만들 정도로 무예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네요. 




그의 이른바 등발(?)은 장비를 보는듯하여 청룡도와 같은 무거운 무기도 잘 들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유능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는 과거 효종 시절의 북벌을 꿈꾸기도 했죠.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기반은 노론이었다




문제는 그런 그를 영조는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영조는 세자 선이 학문에 매진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파인 노론 세력이 아닌 점차적으로 소론과 남인, 북인등을 가까이하자 그 실망은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749년 영조의 병이 악화됩니다. 이에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게 되었죠. 이 때부터 세자 선의 본격적인 정치 등판이 이뤄졌는데요. 문제는 그가 기용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야당인 소론, 남인, 소북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소론등은 영조의 정통성을 무시하는 붕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들은 영조 이전 경종이 영조가 독살했다고 믿고 있었고, 소론 중 급진파는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이인좌의 난). 이 사실은 영조를 더욱 분노케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격적인 노론의 반격이 이뤄집니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던 이 들을 모신 곳. 목촌 16의사 충의비




2. 노론의 반격 


정순왕후의 생가와 무덤





노론의 반격의 선봉에는 15세로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가 있었습니다. 정순왕후는 노론집안인 김한구의 딸로서 말 그대로 뼛 속까지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이른바 베게송사, 잠자리에서 영조에게 세자, 동궁이 소론과 북인, 남인들과 계속 결탁하고 다닌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세자를 모함하는 여자는 정순왕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 역시 여기에 동참합니다. 숙의 문씨는 아래와 같은 소문이 일어나고 있다고 영조에게 베게 송사를 합니다. 



밤마다 세자께서 몰래 밖으로 빠져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옵니다. 




이러한 모함으로 인해서 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의심은 더욱더 커져갔고 그는 세자를 불러 호되게 질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황상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구체적인 근거없이 후대에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거해서 나온 내용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적극 찬성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홍봉한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가고 있을 떄, 뱃놀이를 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 울부짖으며 세자를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이를 처벌해달라고 상소까지 올립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죽어가고 있을 때 세손과 달리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쓴 글에서 당연히 사도세자를 좋게 쓸 일이 없겠지요. 한중록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닌 자신의 한씨가문을 변호하기위해 쓴 책입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시작되고 맙니다. 사도세자는 계속된 모함들이 자신이 동궁전에 궁녀들 중 정순왕후와 연관된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에 궁녀들을 모아 경고를 하게 되지요. 이 것을 들은 영조는 다시 이에 대해서 질타를 하게 되었고, 점차 그의 증상은 심해져갔으며 심지어 궁녀를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기행행동-영조의 질책이 반복되는 와중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세자는 평양으로 3개월간 유랑을 해버리게 되죠. 문제는 근데 유랑 장소가 평양이란 것이었습니다. 평양은 조선에서 가장 국방력이 강한 국방의 중심지로서 영조가 생각하기는 세자가 이 곳에가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너무도 충분했지요. 




3. 나경언의 사주와 세자의 죽음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나경언의 역모 고변이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세자의 장인 홍봉한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은 시장잡배로서 세자를 고변하게 됩니다. 그가 말한 세자의 10대 기행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세자가 빈의 혜경궁 홍씨를 죽이려 했다. 
2.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다 
3.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놀러다녔다 
4. 북성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다. 


이에 영조는 홍봉한을 불러 세자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에 홍봉한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조차 세자의 죽음을 원한다고 세자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버리죠. 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만에 시체로 발견됩니다. 





4. 내 생각


영화 사도를 통해서 임오화변, 사도세자의 죽음이 이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둔 사도세자의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는 자신이 정치를 대신 맡았던 대리청정시기에 균역법을 시행할 정도로 나름 감각이 있었고, 집권세력인 노론을 경계하기 위해 소론과 남인등을 등용하는 등은 나름 기존의 구태정치를 개혁하려는 마인드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기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전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영조의 혹독한 훈육방식과 정순왕후의 모함등이 없었다면 사도세자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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