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화 #화교 #정크선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영락제
반갑습니다 잇님들! 갬성입니다 !
오늘의 역사는 정화의 대원정입니다!
영락제는 사실 처음부터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이자 명 태조인 주원장은 혜제에게 황위를 주고, 연왕 주체를 변방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이후 혜제가 즉위하자, 연왕 주체를 견제하기 위해서 삭번정책(번왕들의 영역을 삭감하는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는데요. 이에 연왕 주체는 군사를 일으켜 남경을 순식간에 정복해버립니다.(정난의 변) 그리고 즉위한 영락제. 영락제는 자신의 불만세력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 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북경으로 천도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였던 남경에 특무기구인 동창을 두고 주기적으로 감시하게 하여 견제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큰일인 것은 혜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난의 역 당시 궁궐이 불타버렸고, 이 과정에서 혜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혜제가 살아있으며 군사를 몰고 북경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안그래도 영락제는 자신의 황위를 찬탈한 찬탈자란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대대적으로 반역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데 힘썼던 사람이라 이 소문에 신경이 쓰였죠. 이에 기존의 혜제를 추종하는 해안 세력들을 제거하고. 동시에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게 책봉 조공 무역을 강요함으로서 황제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단행했던 것이 바로 '정화의 대원정'입니다.
정화의 대원정은 총 7차례에 걸쳐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환관인 정화는 이슬람 집안으로서 어린 나이에 포로가 되어, 환관이 되었다. 이후 주체를 섬기게 되었으며, 주체 역시 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정화를 중시하였고 이후 환관의 수장격인 사례태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영락제가 남해 원정을 단행할 때, 남방에 이슬람 국가가 많다는 것을 인지한 영락제는 정화를 시켜 남해원정을 단행케 합니다. 당시 남해 원정은 아시아, 유럽을 통틀어 최대 규모였습니다.
62척의 대함대에 2만 8천명의 선원을 승선시켰고, 26년간 7회에 걸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결과 중국은 30여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에 화교진출의 기반을 만듭니다.
정화의 남해 대원정은 상당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일단 동아시아 무역의 능동적인 재개가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영락제 이전 홍무제 시기, 홍무제는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낸 이후 해금령을 내립니다. 이는 북원과 협력하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는데요. 동시에 왜구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서 동아시아의 국제교역이 사실상 마비상태가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영락제의 남해 원정으로 인해서 국제교역이 책봉조공 무역이라는 이름 하에 다시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책봉 조공은 상국인 명국이 제후국에 대해 관작과 물품을 사여하여 이 들을 신속시키는 제도를 말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상국인 명국은 책봉국에게 하례품을 책봉국은 명국에 조공물을 거래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공적인 무역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남해의 대원정은 무려 30개국의 동남아시아 및 여러 국가들을 책봉 조공함으로서 국가 통제하에 동아시아 무역을 재개할 수 있게 됩니다. 유교에서 추구하는 억상정책과 동시에 기존의 무역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둘 쨰, 황제권이 강화됩니다. 일단 실질적으로 명국에 대해 조공하는 조공국을 더 둔다는 것 자체가 황권 강화를 의미하지요. 동시에 억상정책을 통해서 효율적으로 지방세력의 성장을 억압하고 중앙의 통제력을 지방에 깊이 행사할 수 있게 됨으로서 황권이 강화됩니다. 세번째, 당시 중국 문물의 우수성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1598년 무적함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다 규모의 함선이었으며(62척), 이 때 사용되었던 정크선 역시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기술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정화의 대원정은 무려 아프리카 케냐까지 갈 정도로 향해지도술이 발전되어있었으며, 동시에 나침반, 향해술등 종합적인 기술이 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해금령:명나라와 청나라 시기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금지한 법령.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는 중원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주종' 관계로, 조공은 주변 국가의 수장이 중국 황제에게 신속하는 정치적 의례, 책봉은 조공에 대응하여 중국 황제가 그 수장들에게 특정 관작과 물품을 사여하여 신속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 조공책봉관계는 국제 질서의 변동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며, 시대에 따라 의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하고, 실질적인 구속관계를 보이기도 한다.[3]
정화의 대원정은 당대 세계를 주도했던 것이 아시아였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 이렇게 대규모 함선을 몰고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기술과 무력과 힘을 가진 나라는 중국이 유일무이했기 떄문입니다. 이럴 수 있었던 기반은 바로 기존에 명이 멸망시킨 원나라 시기 국제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 그리고 송대부터 이어져온 과학 기술의 발전이 누적되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가지 중에서 전자를 먼저 쳐주고 싶습니다. 자신보다 발전된 문물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원나라 대의 개방적인 성격 이 아니었다면 과연 아프리카까지 갈 수 있는 지도술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이와 다르게 변방에서 쇄국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은 이와 고려시대에 활성화되어 있던 해상무역을 포기함으로서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하였고, 이 것이 결국에는 조선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을 조금 현실에 인용하자면 그렇습니다. 사람 또한 그렇다고 봅니다. 결국 사람도 교류를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진짜 자신을 형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폐쇄적인 마음으로 일관한다면 아마 변화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타인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배려를 통해서 타인을 인지하고 이를 통해 나를 인지하며, 나의 문제점이 있다면 기꺼이 개선할 수 있는 태도. 오늘날 21세기에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상으로 포스팅을 마칩니다 다음 시간엔 더 유익한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