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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웅의 귀환. 그의 영웅적 행적에 대해서

by 감성소년

1920년대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는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엇그제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8/16일 한국에 도착한 영웅의 유골을 대통령이 직접 영접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직접 영접할 정도로 영향력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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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사실 서북지방에서 사냥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 사냥꾼이었다. 포수로서 사냥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가 대한제국 말기, 국권이 점차 일제에 넘어가면서 사냥이 힘들어지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일제가 궁궐을 침탈하며 을미개혁을 강요하던 시기,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되어 화기에 대한 제한이 가해지게 되자 강원도 회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초기 그 규모는 14명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적은 부대로도 일본군 10명을 사살하는등의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그는 유인석 부대와 연대하여 활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포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1906년까지 그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격적으로 그가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 정미의병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총기 강제 수거령이 내려지자, 포수 생활이 어렵게 된 홍범도는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켰다. 이 떄의 규모는 700명 정도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는 약 30차례 넘게 일본군과 싸웠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대는 그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홍범도의 아내를 모진 고문 끝에 죽였고, 장남 역시 의병 전쟁 과정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후 홍범도의 차남도 만주땅에서 결핵으로 숨졌다고 하니, 의병전쟁 시기 동안 사적으로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것 같다.


그는 결국 국망 이후 국내에서 활약이 힘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연해주로 1911년 망명하게 되었다. 1911년 망명한 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부대와 연대하여 한국 국경 근처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볼세비키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가 들어선 것에 대해 우려한 서방 열강들이 러시아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 때 일본도 같이 참여하였다. 실제로 일본은 러시아 적군 공격도 있지만,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들을 소탕하는 것을 목표로 파병하였었다 .이 시기 홍범도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제를 상대로 신출귀몰한 활약을 하며 점차 세력을 확대했다. 결국 1920년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 대한북로군독부란 부대를 창설하고 홍범도는 기존의 활약을 바탕으로 제 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부터는 교과서에 있는 내용 그대로 이다. 유격전을 전개하던 그는 3.1운동 이후 망명이 많아지자 그 들을 훈련시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이 것을 경계한 일본은 정예군을 보내어 소탕하고자 했다. 하지만 홍범도는 이 들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야스카와 지로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를 총공격하여 120~150명을 사상시켰다고 한다.(아직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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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다시 청산리로 이동하게 된다. 청산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때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패배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훈춘사건을 조작한 후 대병력을 이동시켰다. 이 때 여러 대다수의 장군들이 일본의 대병력을 보고 도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홍범도가 끝까지 맞서 싸워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일본의 병력과 교전을 하게 되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에서 군사를 매복해있다가 행군하는 일본군에 대해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약 200여명의 일군을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경우 완루구에서 적에 대해 유리한 지형과 안개가 낀 환경적 이점을 백분활용하여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적을 공격하였고, 이 들이 양 방향에서 포위작전을 걸어올 쯤에 이를 미리 알고 탈출을 하여 일본군 내에 교전이 일어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0002303922_001_20210301191256120.jpg?type=w647 청산리 대첩에서 승리한 후 기념 사진


완루구, 어랑촌, 백운평 전투를 통해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은 일제군대 1000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공을 올렸다. 이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은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최정예 군대였고,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훈련을 한 군대였다는 것. 충분한 군수물자를 갖추고 기관총등의 우수한 무기를 갖고 있는 상대였다는 것. 그에 반해 우리 독립군은 총기도 체코제, 소련제 총, 일본군에게 탈취한 총등 일정하지 않은 총을 갖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숙달력이 부족했던 점. 훈련할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는 점, 굶주림과 추위라는 환경적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같은 엄청난 전공을 올렸다는 것은 실로 정말 대단한 전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독립군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하여 러시아 적군의 비호아래 활동하고자 했던 것이 그 의도였다. 하지만 이 시기 자유시 내에는 한인 독립군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싸고 큰 갈등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관할을 받는 대한 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정의회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두 단체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군정의회에서 적군을 동원하여 대한 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주도하게 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게 된다. 이 후 홍범도는 독립운동에 대한 이상은 가진체,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와 한인 사회에서 농업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 곳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카자흐스탄에서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홍범도 일지'를 작성하였고, 이를 토대로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는 그를 소재로 한 연극 '홍범도'를 하게 되었고 그 것을 그는 관람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한인 출신 극장 운영자인 태장춘의 후원하에 나름 넉넉하게 살게 되었고, 1943년까지 장수하였다고 전해진다.

BandPhoto_2018_11_05_12_25_38.jpg?type=w3 카자흐스탄 연극 극단이 '홍범도'를 연기하는 모습. 사진은 내한 당시의 모습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이었던 영웅이 세탁소직원이 되기까지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단 알고 있는 것은 그가 1920년대 우리 무장독립운동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실질적인 리더였다는 것. 하지만 그가 공산당에 가입했고, 레닌을 접한 사람이었기에, 한국 내에서는 사실 그에 대한 업적이 폄하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 그의 무장독립운동 전공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고, 2021년 8월16일 그의 유해가 마침내 카자흐스탄에서 고국 대전 현충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D%99%8D%EB%B2%94%EB%8F%846.jpg?type=w580 카자흐스탄에 존재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사실 여기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장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연해주에 있던 시절 계몽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병들에게 줄 총 구입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농업을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연해주 내 한인 사회의 권익을 위해 힘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 홍범도로 국한해서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과정들, 계몽운동과 독립 자금 마련, 그리고 권익 보호등의 활동들은 독립운동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독립운동의 대부분의 범주에 해당하는 활동을 몸소 실천했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 그의 행적들, 나라를 위했던 마음들이 오늘 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NISI20210815_0017847490_web_20210815143832_20210815143907776.jpg?type=w647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오게되었다.(출처:네이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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