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봉건 반외세의 역설
한국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다. 정말 이런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딱 하나의 예시를 들어도 과거 청나라를 세웠던 누르하치가 속한 여진족은 지금 흔적도 없이 중국민족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그들이 속한 여진 문자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한 때 삼국지에 나오는 위, 촉, 오. 껄떡하면 100만대군 하지만... 그 위, 촉, 오를 통일하다 싶이한 서진은 흉노에게 떡실신당하다 싶이하였다. 그런 그 들도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왜일까란 생각을 많이했다. 그 것은 문화으 역량이다. 우리가 일단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시각이 현재 시점에서 많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볼 때에도 겉으로 보이는 군사력, 겉으로 보이는 정치체제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에 못지 않게 문화 역량도 정말 중요한 영역이다. 이 문화란 것은 자신의 종족, 즉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 들간에 어떤 공동의 매개체의 역할을 했는데, 이 것이 사라지는 순간 급격하게 민족성 약화, 군사력 약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나라 한국. 이 한국에도 역시 많은 나라들이 있었고, 사라졌지만 확실한 것은 그 들은 이 한반도내에 있었던 한인이라는 민족의식이 있었다는 것(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에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한 후에 '드디어 삼한이 통일을하였다'라는 점에서') 에서 좀 더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둘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거의 15c넘게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갖추고 있었던 중국과의 마찰에도 우리나라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우리나라에게도 2번의 시련이 있었다. 1번째는 몽골과으 전쟁. 정말 엄청난 항쟁이 있었고 엄청난 전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정 내에서는 항복을 한것은 정말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슬프게도 우리나라 기록에는 협상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이 것은 누가봐도 엄연한 항복이며, 그 이후에 어떤 기록들을 감안했을 때도 속국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와 다르게 국왕의 지위를 유지했었던 이유, 자체적인 정부를 유지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몽골과의 대적이 너무 끈질겼다는 것. 그리고 당시 몽골 내에 있었던 권력계씅 분쟁에서 너무나 현명한 판단을 내려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였다는 것. 그 것은 즉슨, 당시 있었던 징키즈칸 내 현제간 내분에서 쿠빌라이에게 정통성을 준, 명목을 준, 사건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고려를 병합하지 않고 자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다루가치, 즉 점령지역에 파견한 지방관에 대해, 고려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을 점령하려고 설치한 정동행성의 이문소에서 고려 관제등등에 간여를 할뿐이었다. 지금 어떤 누군가는 이 말에 대해서 상당히 불코핸 감정을 느낄 수 있다.하지만 이 것을 말하기 전에 당시 원나라제국의 지도를 보고 오라고 말하고 싶다.
서두가 깊었다. 아무튼 어쨋든간 우리나라는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한 나라였다. 하지만 이 것이 결정적으로 끊어지게된 사건이 있었어니 그 것이 내 주관적인 생각에는 을미사변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을미사변처럼 참혹하게 국가의 원수급의 존재가 타국에의해서 죽은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자객에의해서 너무도 처참하게 살해를 당했고, 그 유해를 불태우는 등(그 이외의 역사서에서는 강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의 만행을 저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것을 주도했던 이노우에 공사 및 미우라등의 인간들 단 한명도 처벌을 받지 않고 호의호식하다 뒤졌다.(잘뒤졌다) 그런데 이 불쌍한 명성황후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이 명성황후가 너무 불쌍하게 죽었긴 한데 이 사람이 절대 선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정비이지만, 그녀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걔략(외척 제거)에 의거해서 뽑힌 비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심이 있는 인물이었고 대원군이 권력을 내려놓자 고종의 친정과 함께 권력을 잡게 된다. 문제는 그녀의 태도이다. 그녀는 집안 환경도 아버지를 여의였던 불우한 환경으로 외로움이 많았던 것같다. 그래서 같은 민씨는 같은 가문으로 인정하며, 챙겨주는 등, 대운군이 끊었던 세도정치를 '민비정권'이라 칭하며 주도했더 ㄴ인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나라 국고의 3/1을 써먹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고, 그녀가 실질적으로 정권을 집권한 당시 민씨 일가들이 저지른 행패들로인해서 일어났던 혁명만 두가지이다.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유독 한국사회에서 너그럽다. 그 이유는 당대 민비정권의 반대파였던 인간들이 대부분 친일파로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들도 할말이.... 이 자식들은 김옥균을 뒤따르던 급진개화파세력들이었다. 갑신정변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없지만, 당시 자신들이 아무런 준비없이 급작스럽게 일으킨 난에 대해서 밈중들의 아무런 동조없이 일으켰으면서도 민중을 원망하는 당사자들의 글으 ㄹ보면 정말 어의가 없다. 이런 사상은 박영효, 그리고 독립협회의 주도자였던 윤치호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민중들은 정말 자신들을 밑밪침해주는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었따.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업신였겼던 민비가 죽었다. 그러면 그 당시네은 좋아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권침탈까지 예상못한 그들이 찾았던 것 역시 민비였다.... 그렇다 . 그래서 당시 민비가 했던 정책인 인아무일의 정책, 즉 일본을 끌어들여서 러시아를 제거한다는 명목의 군사 정책은 사실 고종에게 너무 필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말로는 다 할 수 있는 인간이였으며, 그에 대해 올린 홍재학의 상소까지도 불순 자로 처리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역설이 만들어졌다. 민족주의로 가자니 ㄹ거기에 상응하지 않는 인가들오 ㅁ낳고, 반며넷 하회자의로 가지. 이름도 므렜으며 이름난 인간들 역시 했던 만행들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