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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 Apr 23. 2024

사랑고백

어느 무더운 일요일 오후, 선풍기가 털털 거리며 돌아가는 덮밥집에서 밥을 먹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안 빼서 좋아”

오후 2시 반에 뒤늦은 점심식사를 한 탓인지, 매장 안에 손님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뭐 특별히 싫어하는 거나 가리는 게 없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내가 하자고 하는 거에 늘 쿨하게 그래라고 말해줘서 좋아. 그거 안 맞는 거 되게 피곤한 거거든. 하다 못해 밥 먹을 때도 생각해야 하고, 같이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안 맞으면 얼마나 어렵고 불편한데”

그의 말에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좋으면 좋은 거지.


시간이 지나서야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난 그가 말한 것처럼 딱히 뭘 싫어하는 게 없는 사람인가? 가리지 않는 사람인가? 아닌데… 나 되게 가리고 싫어하는 거 많은데. 나는 김치도 안 먹고, 그가 좋아하는 알이나 곤이, 대창, 막창, 곱창도 못 먹는 사람인데. 그가 즐겨보는 공포게임이나 공포영화도 절대 보지 않고, 그의 집을 맥시멀리스트답게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지만 나는 미니멀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가 싫어하는 운동도 나는 열심히 하고 짧은 옷도 즐겨 입고 화장이나 헤어스타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난 분명 그 사람과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는데.


물론 그가 하자고 하는 것들이 싫은데도 좋아,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엄청 좋아하지는 않아도 그와 함께라면,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아서 콜! 을 외치는 건데 그것까지는 모르나 보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만으로도 즐거우니까, 그 시간에 뭘 하는지는 큰 상관이 없으니까 나는 늘 그래,라고 말한다.


그가 섬세한 손길로 새로 이사한 나의 집을 관찰하는 것도, 팔이 떨어질 듯 아플 텐데도 밤 새 팔베개를 해 나를 재워주는 것도,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꼭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것도. 이런 사소한 일상이 어느새 그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벅차면서도 두렵다. 더 깊이 빠져버릴까 봐, 결국 언젠가는 해야 하는 그 이별이 너무 아플까 봐. 새로 이사한 나의 집에는 어느새 그가 골라준 인테리어로, 소품들로 하나하나 채워진다. 나보다 더 열심히 치수를 재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면서 집을 꾸미는 모습을 보며 나의 집, 나만의 공간도 어느새 그로 채워진다. 그의 사진 하나 집에 있지 않지만, 집 안 어디를 봐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언제 한 번은 그에게 나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연인이라면 당연히 언젠가 한 번은 상대방에게 물어볼 법한 질문이다. 그는 꽤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나의 일상에 어느새 스며들어서. 한 번은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네가 없으면 어떨까 상상해 봤는데 상상만으로도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내 일상에 네가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그만할 수가 없겠더라”

그렇게 그는 큰 호흡을 들이쉬고는 덧 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우리 여행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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