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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 Jun 28. 2023

변화의 10cm

어릴 적 나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아이였다. 부끄러움도 많고, 낯도 많이 가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던 게, 나는 영어의 ABCD도 모른 채 국제학교에 입학했다. 그 누구와 대화할 수 없었고, 수업 내용도 알아듣지 못했다. 자연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또래 아이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들킬까 봐, 그리고 아이들이 내 말에 비웃을까 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집 안에서도 말수가 적었다.


당시에 가지고 싶었던 ‘다마고찌’라는 게임기가 있었는데, 그 장난감 하나를 사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일 년을 끙끙 앓았다. 당시에 오천 원이던 그 작은 게임기는 겨우 일 년이 지나서야 생일선물로 사 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에게 얌전하고 떼쓰지 않는 아이로 컸다. 사실 떼쓰지 않은 것도 아니, 갖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라, 그저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보통 점심을 사 먹었다. 한국의 학교들처럼 급식을 받는 게 아니었고, 매일 새로운 메뉴들이 여러 개 나오면 학생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한 줄로 서서 식당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메뉴를 이야기하면 아주머니는 그 음식을 내주었다. 그러나 너무 부끄러움이 많은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너무 부끄러워 가장 짧은 단어인 ‘same’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 앞사람이 먹는 메뉴를 억지로 먹어야만 했다. 앞에 서있는 사람이 시키는 메뉴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가장 짧은 단어인 ‘same’ 밖에 없었으니까.


국제학교는 시험보다는 발표, 그리고 조별활동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했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과제에 임하는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여전히 위축되어 있었고, 틀리든 말든 개의치 않고 아무 말이나 외쳐 대는 외국 아이들이 신기했다. 자연스레 어릴 적 학교 성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소극적인 나를 챙겨주던 한국인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는 MUN (Model United Nations, 모델 UN)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선배의 늘 당당하고 밝은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나도 그 동아리에 들어가면 저 선배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반쯤 속는 셈 치고 나는 MUN에 들어갔다. MUN은 말 그대로 UN을 모티브로 한 동아리로, 국제 정책이나 이슈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동아리였다. 특징이 있다면 내가 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싱가포르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 국제 정책이나 이슈가 싱가포르에 유익한 방향이 되도록 토의를 해야 했다. 다양한 국가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서로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는지, 또 좋은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나는 MUN을 하면서 점차 활동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대본을 다 쓰고, 전날에도 여러 번 연습을 해야 할 만큼 자신감이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있었고, 대본 없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다름 아닌 학교 선생님들이었다. MUN은 나름 엘리트 동아리였다. MUN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내 말에 더욱 귀를 기울여 주었고, 나는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내 의견을 어필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수줍음이 많던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고등학교 4년은 아마도 나의 전성기일 것이다. 푸릇푸릇한 젊음과 무한한 체력으로 나는 학교 구석구석을 쏘다니고 다녔다. 해가 뜨기 전부터 나는 음악실에서 클라리넷을 불었고, 점심시간에는 밥도 거른 채 학생회 멤버들끼리 회의를 했다. 오후에는 수영, 배구, 축구부에서 운동을 했고, 주말에는 봉사활동을 다녔다. 해외도 돌아다니며 타 국제학교들과 문화적, 학술적인 교류 동아리에도 참석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는 교내 과학토론대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하고 싶은 과학 관련한 동아리나 활동이 우리 학교에는 없어서였다. 나는 그러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원서를 쓰고, 고등학교 4년 동안 했던 활동 증명서들과 상장을 모두 모아보니, 족히 10cm가 넘는 종이 한 무더기가 나왔다. 일반 종이파일로는 다 담을 수 없어, 나는 통이 큰 바인더를 구매해야 했다. 그때 새삼스럽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치열히 살아왔는지를 문뜩 느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굉장히 많은 일을 했구나, 돌이켜보니 이런 일들이 다 있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바인더를 닫았다.


이렇게 쌓아온 시간들이, 경험들이 모두 한 겹 한 겹 소중히 쌓여, 결국 내 인생이라는 책을 얼마나 쌓아 올릴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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