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이 축복이 되는 조건

선택이 주인을 찾아갈 때

by 가장자리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님이 최고야.“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아빠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실제로 나는 교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나는 저 말이 끔찍이도 싫었다.

조언이 아니라 강요 같았고,

성차별이자 내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결국 교대를 자퇴했다.


내가 다른 대학을 졸업할 즈음

심각한 저출생으로 학생들이 줄었다.

임용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도 발령대기가 길어지고

정부는 뒤늦게 교대 정원을 줄였다.


당시에는 내심,

‘교대 자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평범한 직장인이 된 지 어느덧 n년차.

뒤늦게 내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여름이고 겨울이면, 학교의 방학이 부러워 미치겠다.


이제야 내가 선생님이라는 직업과

잘 맞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


지난 선택에 대한 평가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돈이 시대적 가치가 되자,

“지금이라도 로스쿨에 갈까?”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로스쿨을 사법고시만 못하다고 했다.


친구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경제 위기가 오면 공무원이 떡상할 거다.”


친구가 공무원이 됐을 당시에는

공무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었더랬다.


이런 일련의 장면들을 뭐라 요약할까.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다’?


그보다 나는,

‘미래는 불확실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최선의 선택이

내일의 최선은 아닐 수 있다.


-


아이를 키우다 보면

주변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한다.


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한다던가,

초등학생 때부터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던가.


회사에 누구는 자식 교육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매일 출퇴근을 하고

대치동 라이드를 한다던가.


다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아이가 원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아이가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나?


-


기술의 발전으로 변화는 더 빨라졌다.

지금의 내 일자리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아이와 나 사이의 30년의 간극을 생각하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라는 명목으로

아이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느낀다.


오히려, 내가 살아봤더니

내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


아이의 중요한 결정에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도 크나큰 불안을 동반할 것이다.


혹여나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아이를 방임하는 부모로 보이지는 않을까.

더 나아가 아이의 성취를 공유하고 싶은

부모의 욕심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불안을 이유로

부모가 아이의 선택을 대신하면,

아이는 그 선택에 책임을 느끼기 어렵다.


선택의 결과가 좋더라도,

아이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선택의 결과가 나쁘다면,

아이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됐다’며

부모를 원망할 것이다.


이 모든 것 중에 부모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불안 밖에 없다.


아이는 불확실성이라는 조건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후회하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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