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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an 책방 Jan 09. 2022

김밥과 영어

직장인 일상 전투 드라마

김밥과 영어 part 1.


얼마 전 부 터 참석하기 시작한 영어토론회가 수요일마다 있어서 대학 근처 카페를 간다.  퇴근버스를 타고 가면, 시간이 좀 남아서 조용한 곳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분식집에 들러 근사한 저녁을 먹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 허기를 달래면서 옛 생각이 났다. 바로 김밥을 배달하던 시절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IMF라는 거대한 경제 포탄이 대한민국을 파괴한 1997년이었다.  소도시에서 그럭저럭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던 가정은 한순간에 공중분해되었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고향으로 가셔서 김밥장사를 하기로 시작하셨다.  조그만 가게를 한 개 전세로 받은 것인데, 둘째 이모의 도움이 있었다.  나와 형의 역할은 배달이었다.  형은 당시 늦깎이 대학생이었고, 나는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앞둔 휴학생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아침부터 김밥 및 분식 재료, 김치를 준비하셨다.  나는 거의 매일 동네 약수터로 가서 물을 떠 오고, 농협이나 시장에 가서 쌀과 음식 기본 재료를 구매하였다.  하루 이틀은 재미로 할지 모르겠으나, 매일 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점심시간에 거의 정점에 도달했다. 다행히도, 장사가 정말로 잘되었다. 나는 가게에 거의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배달하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김밥과 홀 써빙에 손이 다 부르트셨다.  물론 수업이 없는 시간에 항상 형이 찾아와서 일을 거들었다.  그 당시 너무 바빠서,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숨이 차 올랐다.  그렇게 폭풍과 같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시 저녁 시간을 준비하며 손님을 맞았다.  어머니께서는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떡볶이 소스, 돈가스 소스, 김밥 재료 등을 준비해 놓으셨다.  


저녁때는 낮 시간보다 한가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가끔 다수의 학생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저녁을 찾기 때문에 엄청 바빠지기도 했다.  MT나 학생회 뒤풀이처럼 보였다.  그때 당시 나는 휴학생이었다.  다시 복학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공부하다가 잠시 식사하러 온 학생들이 부러워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늘 보던 일일 드라마를 보면서 가끔씩 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밤 9시가 넘어서면 공장이나, 농사짓는 분들로부터 야식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어쩔 때는 밤 12시에도 주문이 들어왔다.  배달 장소는 멀어도 음식 주문량이 꽤 많기 때문에 항상 배달했다.  괜찮은 후식 서비스와 함께 말이다.   


하루 일과는 보통 새벽 한 시쯤 마무리 지었다. 어머니는 다음날 사용할 육수를 끓이셨다.  그리고, 나와 형은 가게를 청소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서 약간은 활기찬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가게 한편에 있는 다락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다.  형은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 긍긍했다.  김밥 몇 개를 싸 갖고서 말이다.  다락방은 엄청 더웠다.  부엌의 환기구가 다락으로 지나가게 되어있어서 육수를 대피운 후 다락방은 찜질 방 그 자체이다.  겨울이라면 따뜻한 기운이 있어 좋지만, 여름에는 거의 지옥에 가까운 더위이다.  그래도 보람찬 마음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너무나 뿌듯했다.

 



김밥과 영어 part 2.


서비스업은 봉사하는 직종이다.  배달한 음식을 보고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굉장히 기쁜 일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속상하기도 했다.  어느 선선한 봄날 조금 늦은 저녁 공단에 있는 한 회사로부터 배달이 들어왔다.  공장에서는 대략 열댓 그릇 정도를 주문했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손님이다.  조금 늦은 저녁이기에 과일이라도 조금 썰어서 서비스로 준비해서 배달하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과중한 업무에 잔뜩 성난 현장 작업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의 관리자가 늦은 저녁까지 밥 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일만 시킨 것 같았다.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온갖 불만이 배달원에게 쏟아졌다.  나름 정성을 쏟았는데, 배달원이라는 이유로 온갖 멸시를 하는 근로자들이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식사를 하면서는 최고의 맛을 느꼈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돌아왔다.




 한 번은 비가 세차게 몰아치는 여름에 일어난 일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배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였다.  그리고, 한 아파트에 도착하였는데, 늦었다는 이유로 주문한 사람이 잔뜩 뾰로통해져 있었다.  난 그때 엄청 난 비를 맞은 채로 문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이 배달원의 직무라 생각했다.


오후 3시경은 그나마 틈새 시간이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어머니는 그 시간에 부족한 반찬 준비, 소스 등을 준비하였다.  난 그 시간에 책방에서 책을 빌려다 읽어보거나,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 당시 본 책들은 일본어 기본 서적부터, 소설까지 다양했다.  책 읽는 시간만큼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던 것 같다.  가끔 손님 중에 내가 가게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조금 의아해하기도 했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다니는 배달원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때는, 오후 짬 시간이 그렇게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그때 얻었던 것이 있다면, 공부를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인드와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였다.  비록 그때의 경험이 나의 사회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을지언정, ‘학구열과 꿈’이라는 황량한 들판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글은 2010년  필자가 회사 연수생으로서, 영국으로 석사 유학을 다녀온 후 작성 한 글입니다.  글의 배경은 1998년입니다.


본문에 있는 사진은 2008년 유학시절 J가 만들어준 김밥입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2021년 이 글을 정리하는 시점, 지금도 영어공부를 즐겨합니다.  김밥이나 떡볶이를 즐겨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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