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와 브런치를
괴테의 <파우스트 1>을 읽고
파우스트 박사님께,
젊어서 당신을 잠시 뵙고 이제야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그때 도대체 진도를 나갈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번역하는 대목까지 읽고 접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목이 외람되기도 하고 신선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고 일반적인 기승전결이 없어 재미를 붙이기 어려웠습니다. 그 후로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 내 생애 결코 읽지 않을 책 카테고리로 분류해 놓았었지요. (영화로 때울지언정) 이번 가을, 독서 모임 토론 도서로 선정되어 숙제를 하느라 할 수 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놀라고 후회 막심했네요. 당신을 더 빨리 알지 못했음을. 문학의 향기가 이리도 밀려오는데.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
당신은 제 고민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 지요. 도대체 글이 써지지 않아 날마다 한숨만 쉬는 나날을요. 이 문장을 만나는 순간 숨통이 조금 트였습니다. 부디 저의 방황의 시간에 오셔서 특별 수업을 베풀어 주세요. 그러면 저도….
잊혔던 첫사랑과 우정, 젊은 날의 노래를 기억해 낼 것입니다. 끊임없이 용솟음쳐 오르던 샘물 같은 선율을요. 첫 번째 메아리와 갈채까지도.
미궁 같은 삶의 미로에서 진리에의 충동과 환상에의 기쁨을 찾아낼 것입니다. 꽃봉오리의 기적을 약속해 주는.
상상력에 온갖 풍류를 곁들이고 이성, 오성, 감성, 정열에 깜찍한 익살을 더해서 멋들어진 걸작을 선보일 것입니다.
잡다한 형상 속에 약간의 명징함을, 수많은 오류 속에 진리의 불꽃 한 점 흘려
최상의 술을 빚어, 누구도 맛보지 못한 포도주로 세상을 소생케 할지도요.
고요하고 엄숙한 정령의 나라도 방문하게 될까요? 폭풍우를 미친듯한 열정으로, 노을은 의미 깊게 타오르게 하여, 사랑하는 사람 가는 길에 아름다운 불꽃 뿌릴 겁니다. 이름 모를 잎새 엮어 영예의 관도 씌우며.
특별 수업을 마치면 그 옛날 뿌리신 지혜의 열매, 당신의 애제자 몇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태초에 행위(행동, 일)가 있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박사님!
당신은 83세까지 책을 쓰고 퇴고하며 왕성하게 일하셨네요. 저희 브런치에도 당신 같은 동사형 인간이 있습니다. 문우의 권장 도서를 하루 만에 뚝딱 해치우고 독후감을 발행하는 S 작가님입니다. 자신을 닮았다고 기뻐하시겠지요?
다른 면으로 당신을 빼닮은 작가님이 계십니다. 법학 철학 등의 인문학에 광물학 색채학에도 능통하신 박사님처럼 사회학 역사학 등에다 이과 학문에도 해박한 B 작가님입니다. 저희 시내 바닥은 아직 가뭄인데 그분 강에는 맑은 물이 힘차게 흘러들어와 노 젓느라 고생하고 계시지요.
2권은 우선 통독만 했는데 얼마나 깜놀했는지 모릅니다. 인조인간을 만드신 대목에서요. 200년 전에 AI의 원조를 생각해 내신 혜안에 경의를 표합니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서 물리, 수학에는 까막인 저희에게 시대의 흐름 AI를 가르치는 SP 작가님이 계시는데. 그분도 당신의 히든카드, 수제자였을 줄이야.
그저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었다고 한탄했던 마음을 당신께 들켜버려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겠습니다.
2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 <일리어드 오디세이>를 읽어야 해서 독서를 무사히 마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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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글씨체는 <파우스트> 본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파우스트 I> 정서웅 옮김
대문의 그림
ROSKÓ Gábor 의 <Let's See What's the News in the World> 1989 헝가리 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