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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Oct 19. 2023

놀라움과 기쁨

호랑 작가님의 『지금이야, 무엇이든 괜찮아』를 읽고

 브런치 호랑 작가님(김정희)의 그림일기(그림이 있는 수필집)『지금이야, 무엇이든 괜찮아』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평이한  제목의 책이 그림과 글 모두 깊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유려한 스케치에 ‘와!’ 하는 감탄이 나오고 담백한 수필에 또 한 번 빠진다.

 해바라기, 모과, 배추, 대나무 숲, 패랭이꽃, 벼이삭, 귤 즙 흘리는 제주의 아침바다, 들녘 배경의 장독대 등등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자연을 닮은 빛나는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며 고갱의 작품 못지않은 여운을 선사한다. 책 중간 즈음 ‘금방 쪄낸 감자처럼 때로 뜨겁게 살아내고 싶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미 ‘앗 뜨거!’ 할 정도의 뜨거움이 느껴진다.

 열정 가득하면서도 진솔하고 향토적인 글에서 느낀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동류의식과 연대감을 느꼈다.

      

 맨 첫 장은 ‘이제는 나만을 위해 외롭게 살아보겠습니다. 외로웠던 적이 없다’로 시작한다. 오 형제의 맏이로 아내와 어머니로 한달음 내달리며 외로울 틈이 없었던 작가의 새로운 결심이다.  어느 날 "지금이야!"라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맞닥뜨려 "무엇이든 어디든, 괜찮아!" 하는 결론을 얻었다.

 나도 갱년기 한참 이후, 잊혔던 글쓰기가 생각났기 때문에 작가의 속내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특히 그림에의 꿈을 발견하고 색을 묘사한 장면-시골 자연 속에서 찾아낸 색깔에의 갈망-이 인상적이었다.


 시골은 총천연색의 색깔이 버무려진 공간이다. 도시의 인위적인 색깔의 화려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향연이 펼쳐지는 곳에서 먹고 자란 내게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색깔이었다.

 봄을 기웃거리며 삐죽이 혀를 내밀던 연두의 앵두나무순, 입안에서 터지던 빨강 딸기, 노랗게 굴러다니던 참외, 밭에서 뽑아 먹던 흰 무, 사촌 오빠의 손에서 쩍 갈라지던 객기의 빨강과 검은 씨의 존재감 두드러지던 수박, 지겹고 지겹던 사춘기 무렵의 배추밭 초록, 죽은 옆집아이 향이의 가짓빛 입술, 할머니가 쥐어주던 주홍색 감, 아버지의 우윳빛 막걸리, 황토색 신작로에 깔리던 어둠, 어스름이 깔리며 하루가 저물 때 기어들던 불안한 회색 ---  

   

그래서 작가님의 다음과 같은 다짐과 선언의 대목에서 안도감이 솟으며 마음으로 갈채를 보냈다.

     

늘 읽었고 썼고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온전히 ‘나’로 사는 지금의 ‘나’가 있다.


##  내 삶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어머니의 손을 그리면서 눈물이 나서 그릴 수 없었다. 사연을 읽으며 그 손의 스케치를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났다. 그 손의 모습은 우리 모두 어머니의 손이니. (대문의 그림)

     

 이손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에. 휘고 굽고 닳고 손톱은 뭉툭하니 짧다. 근육 없이 뼈만 남아 엷은 피부에 덮여있는 이 손을 파먹으며 나는 살았다.


 머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때 그 다양한 쓰임새에 놀랐다. 초봄, 머위 순을 따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작가님 가정(家庭)과 대조적으로 나는 자라면서 머위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시집와서 머위를 쌈으로 처음 만났는데, 시어머니의 입맛을 돋우어 밥도둑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작가님 머위 이파리 그림을 보니 쌉싸름한 그 맛이 떠오르며 어머니 소천 후 머위 잎을 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년 봄을 벼르리라.

    

 ##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다.      

 

 배추를 키워 본 사람만이 적을 수 있는 세세한 배추의 일대기와 배추의 최선, 김치로 거듭나기까지, 석양 속 핏빛 패랭이꽃과의 조우, 등에 업혔던 소녀 가장 은순이와의 애닯은 우정 등등.

 스무 살에 처음 내소사 갔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눈 예보를 듣고 즉흥적으로 눈 속의 산사(山寺)를 찾아갔지만 무서움과 막차에 대한 걱정으로 고독과 운치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모험담이다. 청년과 다르게 아가씨 신분으로 외딴곳의 낭만을 느끼기에는 어디든지 위험 요소가 많다. 작가의 로망과 현실의 상황이 대비되는 아이러니와 안타까움을 잘 그려 놓았다. 잠시 동안이지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설경과 적막(寂寞), 동시에 엄습했던 두려움이 실감 났다.

 ‘피안교’ 앞에서 만난 걱정과 근심, 이가 맞부딪치는 무섬증 묘사에서 그만 폭소가 터져 버렸다. 피안의 뜻과 대조적으로 너무도 무거웠던 감정의 보따리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  작가님의 큰 우산이 된 아버지와 자연이 부러웠다.


 작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셨다. 가진 것 넉넉지 않아 풍족하게 주지 못한 것, 늘 애석해했으나, 오동나무 잎처럼 크고 넓은 인품아래 다섯 남매를 아들딸 구별하지 않고 걱정 없이 잘 키워내셨다. 부모님을 감자처럼 순하고 동글동글하며, 큰소리 내 꾸짖지 않으셨던 분들, 가난했으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게 골고루 사랑을 나눠준 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또 그 이상으로 훌륭한 점이 있으셨다. 시를 쓰겠다는 딸에게 파처럼 매운 정신으로 살라 하시며 다음과 같은 조언을 주는 것이 아닌가!


“꺾어졌으면 꺾어졌다고 말해야 되는 거셔. 머리로 맨들지 말고 가슴으로 말해야 한다. 그려야 읈는 사람, 못 배운 사람 죄다 알아듣는 거셔. 이미 나온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느끼고, 섭렵해야 비로소 자신의 시가 나오는 것이지. 절대로 시는 하루아침에 그냥 나오는 법이 없는 걸로 안다. 나는.”  

   

 예술에 대한 근본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였다. 어떻게 아셨을까? 우직하게 농사를 지을 때 자연이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을까? 아버지도 시인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가는 고민 많은 이십 대를 통과하던 어느 초가을, 양철지붕에 청대추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소리로…. 나는 이 대목에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이십 대에 들었던 소리들은?

청대추 구르는 소리에 버무려지는 이십 대의 갈망과 회한은 얼마나 풍부한 문학의(예술의) 토양이 되었을 것인가? 대나무 숲을 가르는 바람 이야기도 있다.

 자연과 아버지가 빚으신 예술가-화가이자 문학도-는 보통사람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현재의 책에서도 감동을 받았고, 앞으로의 작품도 고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눈밭에서도 파는 초록 잎 꼿꼿이 세워 파란하늘을 이고 있다.'/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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