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네게 편지를 쓸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트로이 전쟁에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너는 여성들의 공공의 적이었으니까. 인물에 자신 없는 내가 널 제일 미워했던 것 같아. 정확히 얘기하자면 깎아내렸지. 예쁜 애들은 뭔가가 부족해, 내면이 텅 비었어, 흥 중년이 되면 평준화되는데 뭘~ 하면서. 그래서 이런 카테고리에 들지 않는 미인을 만나면 당황하곤 했어. 김태희처럼 공부도 잘하는 톱스타라던가, 성품도 춤 실력도 뛰어난 아이돌 가수라던가.
이름난 고전『파우스트 2권』3막에서 네가 청중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네어 깜놀 했지.
“찬사도 많이 받고 비난도 많이 받은 헬레나입니다. 막 상륙한 해안으로부터 오는 길이에요. 아직도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듯 어지럽군요. ----” **
『일리아드』속의 네 분위기와는 다르게 미모 플러스 고상한 모습으로 나와 놀란 게 아니야. 미인의 위력에 감탄한 거지. 어쩜 BC 1200년경의 네가 17세기 독일의 문호에게 스카우트된 거니? 괴테 선생의 애지중지 파우스트, 그 생애 가운데서도 2권 성숙한 파우스트의 연애 대상으로…. 엄청난 시간 여행을 감수하면서 낙점될 수가.
스파르타 메넬라오스 왕의 궁전 앞에서 시작했다가 게르만 민족의 언어와 영토가 나오며 중세 기사 모습의 파우스트를 만나니, 악마 메피스토펠스와 계약했다는 것을 핑계 삼아 역사와 영토를 종횡무진했네.
처음엔 괴테 선생까지 미웠어. 뭐 영화 찍는 것도 아닌데 영화감독처럼 주인공으로 미인을 데려왔을까? 하며. 책을 읽어가며 오해가 풀렸지. 괴테 선생은 미모 때문에 너를 택한 게 아니었어. 서양 고전 중의 고전 호메로스 작품 속의 여 주인공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같아.(그나저나 아내를 두 번 빼앗기는 메넬라오스왕은 어떡하라고~)
선생은 네게 지적으로 꽤 건사한 옷을 입혀주셨더구나. 네가 파우스트랑 각운에 맞는 시 짓기 대화를 하며 썸을 탈 수 있도록.
헬레나: 어찌하면 저도 그토록 아름답게 말할 수 있나요? (auch so schön)
파우스트: 마음에서 우러나오면 되지요. (von Herzen gehen)
가슴에 그리움이 넘쳐나면 둘러보며 묻지요 (von Sehnsucht überfließt)
헬레나: 누구와 함께 즐길 거냐고 (Wer mitgenießt)
파우스트: 이제 마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현재만이 (schaut nicht zurück)
헬레나: 우리의 행복이지요 (ist unser Glück) **
게르만어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너의 대화로 시작해서 각운을 맞추며 언어의 예쁨을 뽐내는 대목에서 시샘이 났어. 아니 딱딱한 독일어가 그 정도라면 우리 한글은 더더욱 유려한데 하며.
그러면서 엉뚱한 상상을 잠시 했지. 비슷한 시대의 연암 박지원 선생도 이런 작품을 충분히 쓰실 수 있으셨을 걸. 너를 데려와 자신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게 한다면. 괴테 못지않게 재치가 번뜩이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운을 만드실 텐데 ….
그러다가 네가 조선 시대에 온다면 큰일 난다는 결론이 났지. 조선의 열녀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지아비를 떠나 파리스 왕자에게 인도되었을 때 왜 자결하지 않았느냐?(눈이 맞아 파리스 왕자를 따라나섰다는 비화는 감히 상상도 안될 것이고) 또 전쟁이 끝난 후 메넬라오스 왕에게 되돌아갔을 때 염치가 그리도 없을 수 있냐 하며. (아무리 그 미모로 남편의 마음을 녹였다 할지라도.)
조선의 지어미들은 너를 냉큼 돌려보내고 차라리 오디세우스 아내 페넬로페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연암 선생을 졸랐을 거야.
괴테 선생이 몇 천 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널 불러냈기 때문에 내 상상도 꼬리에 꼬리를 무네.
과연 헬레나 네가 이 시대 온다면 누구와 썸을 탈까? 파리스 왕자에 걸맞은 사람, 최고의 미남이면서 부와 권력까지 갖춘 이는 누구일까? 파우스트에 견줄만한 지향(志向)이 있어 방황하는 이는? 중동의 부유한 산유국 미남 왕자 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넌 지구의 동쪽, 한반도의 어떤 남자를 지목할 것 같아.
아마도 방탄이나 엔시티 멤버 중에서 네 타입의 꽃 미남? 혹은 고뇌하는 어느 브런치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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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권『파우스트 2』정 서웅 옮김 에서 인용했습니다.
대문의 그림: RIPPL-RÓNAI József <Lady in a Black Veil (Madame Mazet)> 1896, 헝가리 국립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