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미티의 형광 이끼
ACCI 작가님 영상 <요세미티 잔잔하게 여행하는 법> 댓글 동화
옛날 옛적 초록나라에 신붓감을 구하는 왕자가 있었다. 초록의 숲과 벌판으로 유명한 그 나라는 부유하고 왕자도 핸섬해서 긍지가 대단했다. 그곳은 초록이 법이라 백성들은 맑은 공기와 연둣빛 경관을 가장 귀히 여겼다. 초록 나라에서 생산되는 보석 빛깔 또한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다.
연일 성대한 파티를 열어 이웃나라의 공주들을 초대했건만 아가씨가 낙점되지 않았다. 왕의 병환으로 조속히 후계자 승계를 마치려는 왕비와 달리 왕자는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고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
어느 날 지혜롭기로 소문난 신하가 찾아와 왕비에게 조언했다.
“이웃 요세미티 부족의 족장 따님이 아리땁기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 아가씨도 한번 초대하면 어떨까요?”
“그 가난한 아와니 족 말인가요? 아구가 크다는 족속? 훗훗 어떻게 입 큰 여자가 미인일 수 있겠어요?”
왕비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그곳 족장이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요세미티족들은 자신들을 칭송하거나 사절단을 보낸 적이 없었다.
겨울이 오자 초록나라는 녹색이 많이 사라져 백성들이 힘이 없고 의기소침해졌다. 왕자가 관찰해 보니 이웃 부족 영토에는 초록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부러워진 왕자는 지혜로운 신하를 불러 물었다.
“1월에도 요세미티는 왜 연둣빛이 감도나요?”
“그곳 이끼의 빛깔이랍니다. 바위에도 나무에도 덮여있다는군요.”
왕자는 이웃 부족에게 가서 이끼 싹을 얻어 올 결심을 했다. 귀한 비치와 에메랄드를 선물로 준비했다. 왕비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떠날 때 지혜로운 신하가 배웅하며 말했다.
“하얀 면사포를 쓴 그곳 공주도 꼭 한번 보고 오세요.”
왕자는 사냥을 하면서 이웃 영토 가까이 간 적이 많았기 때문에 길은 어렵지 않았다. 초록나라의 왕자가 요세미티 숲 속에서 걷기 시작할 때 그의 몸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시원함과 고양감이 양쪽 가슴으로 꽉 차오른 것이다. 곧 상큼한 공기 때문인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나라 보다 더 깨끗하다니….”
놀라는 마음으로 졸졸 거리는 시냇물을 따라 올라갔다. 자갈들 주변으로 녹색 미나리들이 소란거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베이비 전나무들도 푸른 잎을 흔들며 방긋거렸다.
“여기는 초록이 더 많구나~”
멀리 웅장한 바위와 하얀 폭포가 보였다. 숨을 고르며 길을 찾는데 갑자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초록나라 왕자님.” 예쁜 꼬마 아가씨가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자 왕자는 깜놀 했다.
“제 이름은 리지. 이곳 숲 속 요정이죠. 처음 오신 분 오리엔테이션 담당예요.”
리지는 하늘 바로 아래 반쪽 둥근 바위를 가리키며 그곳 ‘하프 돔’에서 족장님을 만나라고 했다.
“그 앞에 있는 흰색 폭포 퍽 아름답군요.”
“사실은 우리 공주님에요. 종종 폭포로 변신하죠. 보통 때도 늘 베일에 가려 얼굴 보기 어려워요.”
리지는 친절하게도 바위의 이끼들과 오래된 고목이 간직한 이끼들을 샅샅이 찾아 인사를 시켰다. 바위 이끼들은 왕자에게 정답게 굴었으나 나무에 있는 애들은 도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연두 빛도 색이 바래 보여 이 쌀쌀맞은 애들은 싹을 얻어가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갑자기 리지가 어떤 신호를 보내자 여러 가지 버섯들이 모여들었다.
“왕자님을 환영하는 버섯들의 공연에요.”
갈색, 흰색, 노란색 동그란 버섯들이 빙 원을 그리자 어디선가 보송보송 털을 가진 녀석이 나타났다.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실룩이며 솔로를 추니 무척 우스워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깔깔거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재 이름은 노루궁뎅이~”
거울 호수에 다다르자 리지는 자기 발이 잠을 자야 한다며 분홍색 야생화로 반지를 하나 만들어 주고 안녕을 고했다.
“여기부터는 길이 쉬워요.”
거울 호수는 너무도 고요해서 문득 왕자의 몸과 마음도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리지가 가버려 불안했던 마음도 사라지고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호수의 물에 부르튼 발을 담그고 얼굴을 씻으려다 왕자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참으로 수려한 청년의 모습! 초록 나라에서는 어떤 거울도 이만큼 맑고 정교하게 비춰주지 못했다.
“나르시스처럼 도취해 있다니…. 이끼 싹을 구해야 하는데.”
왕자는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길을 찾으려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는 요세미티의 공주가 거울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심해서 하품을 하다 말고 호수가 비춰주는 어느 청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핸섬한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베일을 살짝 올렸다. 그때 고개를 돌린 왕자와 눈이 마주쳐 놀라서 그만 긴 면사포를 놓치고 말았다. 자주 폭포로 변신해 있던 공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왕자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웃에 이토록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다니….”
곧 운명 같은 어떤 예감에 휩싸이고, 뒤이어 기필코 그녀를 자신의 신붓감으로 삼아야 한다는 열망이 생겼다. 더듬더듬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초록나라의 왕자입니다. 이끼 싹을 구하려 족장님을 뵈러 가는 길 입니다만.”
“…”
공주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얼른 폭포로 변신하기로 했다. 하지만 명랑하게 부수어지는 물줄기 속에 하얀 미소 방울을 몇 개 감추지 못했다.
“아! 프러포즈를 해야 하는데….”
왕자는 설레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그저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돌과 나무의 물 먹은 연두 빛 이끼들이 더욱 싱그러운 색을 띠었다.
갑자기 나무 이끼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바위 이끼에 비해 볼품없다고 생각했는데 비를 머금고 변신을 했나 보다. 어떤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니 그토록 선명한 초록은 처음이었다. 왕자는 선물로 가져온 주머니 속 사파이어와 비치가 부끄러워졌다. 이네들 앞에서는 달빛과 별빛도 초라할 거 같았다.
폭포의 물보라 속에 언뜻 비치는 공주의 미소도 눈부셔서 왕자는 어느 쪽을 봐야 할지 혼미한 지경이 되었다. 마음도 갈피를 못 잡았다.
“이끼를 얻으러 가야 하나? 공주에게 프러포즈를 해야 하나?”
두 미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데, 멀리서 리지가 손을 흔들었다. 발이 다시 살아났나 보다. 그러면서 꽃반지 만들어 주던 시늉을 했다. 왕자는 요정의 조언을 알아차렸다.
“제발 숨지 마시고, 제 마음 받으시기를. 저랑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얼핏 리지가 폭포 맨 위 바위로 기어올라 물줄기에 대고 뭔가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내 베일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분홍 꽃반지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께로 모실게요. 곧 어두워집니다.”
짙은 보랏빛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슬비 속에서 나무들은 신비하고 부드럽게 연두색으로 빛났다. 공주는 자랑스러운 듯 숲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희 요세미티의 숨은 보석, 형광 이끼랍니다.”
---
ACCI 작가님 1월 3일 유튜브 동영상 <요세미티 잔잔하게 여행하는 법>을 보고 나서 지은 댓글 동화입니다. 대부분의 소재를 거기서 얻었습니다.
유튜브 주소: 아찌그래피 ACCIGRAPHY
대문의 사진: Photo by Nate Bell,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