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락 캐년의 달빛
ACCI 작가님 <달의 양면> 댓글 픽션
주말 내내 사막에 있다가 왔다. 누군가는 웬 사막을 그렇게 자주 다니느냐 물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고 유전인자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바다와 산을 좋아했지만 2년 전 모하비 사막 트레일 후로 사막을 자주 간다. 그곳의 거친 돌산에서 나는 갑자기 외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들려준 어떤 이야기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것은 어느 아이 때문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가까운 모하비 사막은 관광객이 많은 편이라 한적한 곳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는 최대한 그룹 관광객을 피해서 사람이 없는 길을 걷는다. 그날 꽤 인적이 드문 커브 길에서 위험한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 어떤 소년을 발견했다. 거친 돌이 쌓여있고 둘레에 어른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돼서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애야!”
“…”
“너 혼자인 거니?”
아이는 금발을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는데 대답할 의향은 전혀 없어 보이고 살짝 웃기만 했다. 천하태평 눈부신 미소는 전혀 부모를 잃은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막에 혼자 있는 이 미성년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앞서가는 남편을 불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짝꿍에게 신호를 보내고 함께 아이를 도우려 돌 언덕에 이르렀을 때 어찌 된 영문인지 시야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가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남편의 의아해하는 표정과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웃는 소년’ 하며 옹색하게 설명하는 내 모습에서 이십여 년 전의 할아버지가 떠오른 것이다.
고 1 때 76세의 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주변 식구들이 그분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지 않아서 나도 덩달아 건성으로 들었던 것 같다. 당연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겼던 당신의 젊을 적 무용담 중에서 되풀이되는 내용이 있었다.
“몽고 쪽 고비 사막을 까마득히 걷고 있을 때 어떤 모래 언덕에서 한 소년을 발견했단다. 금발에 웃고 있고 묻는 말에 도무지 대답이 없었지. 어린 왕자가 틀림없었어. 당장 생텍쥐베리에게 편지를 썼어. 답장을 기다리며. 그런데 한 달 후 들려온 건 답이 아니라 그 파일럿의 실종 소식이었지. 몹시 안타까웠지만, 혹시 그 작가가 떠난 그날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왔을지 몰라. 그 애가 사하라 사막에만 출현할 거라고 생각 말거라. 다른 사막에도 착륙할 수 있는 거야.”
그때는 몰랐으나 커서 알게 된 상식 가운데 하나는 치매환자의 오래된 기억은 대부분 사실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보통 최근의 기억부터 잃게 된다. 할아버지가 그때 들려준 자신의 이십 대 때 기억은 손상된 것이 아닐 수 있었다. 그날 당장 호텔 방에서 e 북을 찾아 『어린 왕자』의 마지막 부분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아프리카 사막으로 여행을 갈 경우---, 제발 부탁인데, 너무 빨리 지나치지 말아 주시기를. 한 아이가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웃고, 금발머리를 날리며,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가 누구인지 짐작하시겠죠.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가 돌아왔다고 빨리 나에게 편지를 보내 주시기를.
솔직히 말해서 그날 이후 자꾸 사막으로 하이킹을 가게 되었다. 그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번 레드락 캐년(Redrock Canyon)의 소풍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스노우문이 뜬다고 해서 이번엔 별이 아니라 달을 보기 위해 떠났다. 작은 사막이라 그 아이를 만날 성싶지도 않았고.
그날 남편이 내 실력을 과신하고 45도 경사면의 뾰족한 표면으로 이루어진 암벽 구간으로 길을 트는 바람에 10초 구간을 20분에 걸쳐 애벌레처럼 움직여야 했다.
초저녁, 빛 공해 하나 없는 시커먼 지평선에 땅에서 막 솟아오른 달은 너무 크고 광명해서 순간 일출인가 싶었다. 녀석은 골든옐로우에서 티타늄화이트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차근차근 움직였고. 그가 비추는 절벽 바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거대한 기암괴석들은 흡사 동화 속의 고성(古城)처럼 야릇했다. 무슨 이야기를 간직한 것처럼…. 브런치에 사진을 올리자 - 그날의 감동을 반 밖에 담아내지 못했어도 - 문우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정. 월. 대. 보. 름. 의 밤하늘은 너무 예뻐서 참회의 마음이 든다면서.
여기까지가 그날의 보이는 풍경이다. 이글의 제목이 <달의 양면>인 것,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봐야 제대로 본다는 생텍쥐베리의 말을 생각해 보시기를.
다음부터가 내가 정말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다. 그날 스노우문이 그토록 우아하고 위엄 있게 빛을 발한 것, 유난히 천천히 움직인 이유를 여러분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모두 그날의 주인공이 정월 대보름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사실 조연일 뿐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조명이었다.
한낮에 거의 뛰다시피 걷던 하이킹 구간의 한 발 내 디딘 그 위험한 경사면에서. 드러눕다시피 하고 있을 때 내가 다른 길로 바꾸지 않은 진짜 이유가 있다.
그 뾰족한 바위사이에서 모래 바람과 함께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지를 뻗고 누운 자세라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아찌님 부탁이 있어요."
"어? 너 누구야?"
"어린 왕자요, 우리 모하비에서 만나 적 있어요."
"그때 너 맞았구나. 근데 무슨 부탁? 양 한 마리 그려줘?"
나는 지레짐작하고 내심 으쓱하여 비슷한 전공이니 생텍쥐베리 보다는 잘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니요. 사진이에요. 오늘 밤 저기 저 바위 성을 한 장 찍어주세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어린 왕자는 그날 밤 사막 한가운데 기암절벽의 고성에서 장미에게 프러포즈를 할 거라고 했다. 달님과 약속이 다 되어 있다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빛을 쏴 주기로 했단다. 별들은 불협화음의 신비한 노래를 불러 줄 거고.
사막의 거친 바람을 피해 언덕 뒤에서 장미를 가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린 네가 벌써 결혼?"
"저도 이제 자랐어요."
"그 장미랑 안 헤어졌어?"
"우리 별엔 꽃이 하나뿐에요."
나는 사실 가시 네 개 달린 그 새침떼기 장미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에게 상처만 준 것 같고, 어린 왕자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차마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치미 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양이 잡아먹지 않아서 다행이야. 생텍쥐베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사람들은 그날 밤 달님이 그렇게 크고 찬연했던 것이 그저 정월 대보름이라 그런 줄 안다. 작년 대보름 때보다 훨씬 밝았는데도…. 녀석이 두둥실 지평선에서 떠오른 순간 호메로스가 내 곁에 있었다면 어떤 시를 읊었을까? 장밋빛 손가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칼을 쓸며 옥좌에서 내려온다는 새벽의 여신 오로라가 질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날 별들이 시끌 법석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남편은 사진 속의 밤하늘이 아쉬워서 담 번엔 꼭 삼각대를 가져간다고 벼른다. 카시오페아가 찌그러졌다, 북극성이 타원형이다 하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끄덕 미소만 지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노래하며 춤추고 까부는데~ 어떻게 바른 자세가 나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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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I 작가님의 2월 27일 발행 <달의 양면>을 읽고 적어본 픽션입니다. 많은 표현들을 그 본문과 댓글에서 빌렸습니다.
대문의 그림: 장욱진의 <바위> 1960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