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대탈츨

카탈루냐 독립투사들의 날

by 램즈이어

바르셀로나에 가려 한다면 우선 카탈루냐 독립투사들의 거사 일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 10월 14일 내가 겪은 일 때문이다. 나중에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날은 열흘간의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었다. 밤 9시 비행기라 오후 6시까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며 우선 대성당 옆의 가우디 박물관을 찾았다. 한적한 분위기에서 가우디의 체취를 만끽하며 나오니 앞서 떠난 동생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시내 곳곳의 체증이 심하니 일찍 출발하라는 메시지였다. 한 시간 당겨서 5시경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보케리아 재래시장은 싱싱한 과일부터 해산물까지 먹음직스러운 좌판 음식에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스타박스에서 핸드폰 충전을 하는데 항공사에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공항의 시위대 점거 예상으로 일찍 출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3시에 호텔에 맡긴 짐을 찾고 출발을 서둘렀다. 리셉션 데스크 직원은 택시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며 불러줄 생각도 안 했다. 고딕지구의 시위대가 사라졌는데도 거리에 택시는 안 보이고 큰 가방 때문에 지하철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 걸어서 택시를 잡았는데 기사는 공항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지금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라면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한동안 서있자 외국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언제 당도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이 넉넉하니 많이 걸려도 괜찮다고 다독이며 냉큼 자리를 잡았다.

택시기사는 몇 명의 카탈루냐 주 독립투사들에게 대법원의 중형이 선고되어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라고 설명해 주었다.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데모가 있는지 길마다 막혀 있었다. 방 탈출 게임처럼 이 길로 접어들어도 갈 수 없고, 저 길로 가도 진입이 어려웠다. 그러자 기사가 이번엔 큰길은 포기하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기 시작했다. 골목도 소통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모퉁이에서 우리만큼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는 젊은 여성과 마주쳤다. 아가씨가 사정을 하고 기사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당연히 그 같은 날은 합승하는 것을 눈 감아 줘야 할 것 같았다.

아가씨는 타자마자 이곳 도로 사정을 환히 알기라도 하듯 기사에게 이 길로 가자 저 길로 가자하며 명령조였다. 어느 길로 가던 뾰족한 수가 없자 그녀는 길 찾는 것을 포기하고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자신은 스웨덴 사람으로 바르셀로나에 출장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패션 관련 회사에 있는데 북경과 서울에도 가본 적이 있다고 덧 붙였다. 스페인어에서 서툰 영어로 바뀌었는데 그래도 셋 중에서 그녀 영어가 가장 나았다.

“서울서는 뭘 했어요?”

“일 때문에 갔는데 여성들 패션을 관찰했어요. 강남이나 홍대에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잡지에서 서울 길거리 패션의 수준이 높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보러 왔던 사람을 유럽에서 만나니 뿌듯했다.

1시간 이상 지났을 때 때 외곽 풍경이 보이며 길이 시원해졌다.

“휴! 드디어 시내를 벗어났네. 이제 됐다.”

내가 안도하며 좋아하자 기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더 큰일이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시위대가 공항에서 모인다고 하니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기사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힐끗 미터기를 보니 요금이 이미 70유로를 넘고 있었다.

‘백유로 지폐가 한 장 남아있고, 합승까지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자신을 다독이며 스웨덴 아가씨와의 대화에 열중하기로 했다. 두 시간 가까이 한 공간에 있다 보니 점점 경계가 허물어져서 서로 간에 세세한 가족 관계까지 밝히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카고 출신 미국인인데 스웨덴인 어머니와 결혼한 후 스웨덴에 정착했다. 자신과 남동생을 두고 아버지는 60대 초반에 세상을 뜨고 어머니는 재혼해서 여행을 즐기며 살고 있다. 자신만 보면 빨리 결혼해라, 아이를 가져라 해서 짜증인데 최근 코스타리카에서 사는 남동생에게 아가가 태어나서 한시름 놓았다는 등.

결국 바르셀로나에서 펀드 관련 일을 하는 남자 친구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녀가 왜 그렇게 스페인어에 능통하며 시가지 지리에 환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아들 이야기를 실컷 했다. 산악 마라톤을 한다는 등. 서울이었으면 아들에게 혼날까 봐 조심하며 삼갔을 내용도 솔솔 흘러나왔다. 아들의 장래 꿈까지도.

“서울서도 주말 데모와 체증이 일상인데, 여기서 까지 시위대를 만나네요.”

“여기서도 종종 시위가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저도 처음예요.”

“우리나라는 좌 우가 무척 대립하고 있어요. 스웨덴은 평온하죠?”

“아니요, 우리도 서로 충돌해요!”

그녀는 당연히 스웨덴에서도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갈등이 있다며 정도의 차이지 모든 나라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삼십 대의 북구 미인에게 사회 문제 관조하는 법을 한 수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공항 가까이 다다르니 차가 다시 막히며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데모하러 가는 사람들과 여행객들이 섞여 있는 듯했다. 대중교통이 공항까지 못 가는 모양이니 택시 잡은 일이 천만다행이었다. 나중에 같은 신세가 될 줄은 모르고서.

6시 반에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를 타는 그녀를 배려해서 제2 터미널에 먼저 도착하기로 했다. 많이 밀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터미널에 무사히 내렸다. 5시 반경 도착했으니 그런대로 한 시간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기사가 얼마의 요금을 그녀에게 불렀고 그녀는 헤어지면서 내 손을 꼭 쥐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다.

이제 내 비행기가 뜨는 제1 터미널로만 이동하면 되었다. 막 출발하려는데 어느 중년 부부가 택시 문을 붙들며 필사적으로 제1 터미널까지 갈 수 없겠느냐고 했다. 내 눈치를 보는 기사에게 허락의 사인을 보내고 부부를 위해 앞자리로 옮겼다.

두 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눈 뒤라 나는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인 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90유로를 넘긴 미터 요금을 가리키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시내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온 거예요? 이렇게 요금이 나오도록?”

그는 이야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신은 프랑스인 건축가인데 제주도의 여러 골프장을 설계했노라고 했다.

“제주도 어느 골프장을 설계했어요?”

나는 제주도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그는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한국의 박 씨를 몇 사람 알아요. 한국엔 박 씨가 많더군요.”

웬 박 씨 이야기가 나오는지. 나도 박 씨라고 알려주었다.

보통 때 같으면 10여분 걸릴 텐데 30분이 넘어도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앞차들이 서 있기만 하자 기사는 이쪽저쪽 샛길로 틀며 돌파구가 있는지 찾아보곤 했다. 아무래도 공항 제1 터미널로 진입은 어려워 보였다.

인도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주황색 줄무늬의 카탈루냐 주 깃발을 몸에 두른 젊은이들, 그들 주변의 앳된 대학생들, 가방을 끄는 여행객들이 뒤섞여 있었다. 차창으로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차가 멈춰 있으니 좁은 공간에서 프랑스인 부부와 대화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궁색해지자 나는 별 의미도 없는 질문을 했다.

“프랑스에서는 어느 골프장이 가장 아름답나요?”

부부는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고서 어디 어디 골프장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발음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했다.

“파리에 오면 연락하세요. 함께 라운딩 합시다.”

그 사람도 형식적인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하마터면 서울 오시면 한번 라운딩 하지요,라고 덧붙일 뻔했다. 아무리 대화가 궁하지만 빈말을 계속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서울 오시면 연락하세요.”로 맺었다.

“당분간은 말레이시아 출장만 있고 서울 갈 일이 없네요. 저는 공 잘 못 쳐요. 일 때문에 골프 칠 시간이 없어서.”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내게 자신의 명함까지 주었다. 차들이 빽빽이 서 있기만 하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기사가 큰 결심을 한 듯 선언했다.

“여기서 내려 주셔야겠습니다. 도무지 어떡할 수가 없네요, 너무 죄송합니다.”

그는 걸어갈 곳을 가리켰는데 그쪽을 열심히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기사는 내게 미터 요금의 반 정도인 50유로를 내라고 했다.

“그라시아스!”

기사가 얼마를 부를까, 은근히 신경 쓰고 있던 터라 안도의 마음과 함께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공항에서 고딕지구까지 보통 때 요금이 40유로 가까이 되었으니까. 내리자마자 비가 더 쏟아졌다.

프랑스 건축가 부부와 헤어지는 인사를 하려는 참인데 남편분이 또 질문을 했다.

“요금 얼마 냈어요?”

“50유로요.”

“와우! 기사 무척 착한 사람이네요. 파리 같으면 어림도 없어요!”

“합승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건축가 부부와 대화가 더 이어졌다. 자녀가 셋이고 모두 혼기가 찼는데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 겨우 한 녀석만 결혼해서 손주가 둘이다. 서울 사람이나 파리 사람이나 자녀가 어서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은 비슷하나 보다.

그분들과 빨리 헤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터미널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고속도로 난간을 뛰어넘어야 했고 가방을 끌 수 없는 자갈밭도 지나야 했다. 아내 분의 짐 가방이 작아서 건축가가 내 트렁크를 도와주었다,

갑자기 내린 빗발에 우산도 없이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끄는 여행객들의 모습은 처량한 진풍경이었다. 비행시간에 맞추느라 묵묵히 걸으면서도 임시 유랑민이 된 끈끈한 연대감에 낯선 이들과 서로 정겨운 눈인사를 나누었다.

짐이 없거나 카탈루냐 깃발을 들고 걷는 젊은이들은 시위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더 바삐 걸으며 옛 아라곤 왕국의 후예로서 전의를 불태우는 것 같았다.

터미널까지 족히 40분 정도 걸었던 듯싶다. 공항은 이미 데모대가 안팎으로 상당 부분 점령하고 있었다. 쫄딱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 화장실에 가니 거기도 대 만원이었다.

시위대가 진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는 것도 그들과 마주해서 경찰들이 일사 분란이 정렬해 있는 것도 어딘지 친숙한 모습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산뜻하게 두 시간 전에 체크인하고 게이트에는 거의 일등으로 당도했다. 두 눈을 감고 쉬는데 사람들이 점점 모이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떻게 어려움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무용담이었다. 오다가 가족들이 생이별 한 사람, 인근 지하철에서 부터 두 시간을 걸은 사람, 큰 가방을 부치지 못해 게이트까지 끌고 온 사람 등 갖가지 사연이 있었다.

처음 30분 지연에 대해서는 정중히 문자가 왔는데 그 후로는 출발 시각이 묘연한 지 더 이상 안내 메시지가 없었다. 어느 단체 여행객들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자 마지막 주인공이 왔다며 떠들썩하게 반겼다.

모두들 시내 상황을 빤히 아는데도 비행기가 예정보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떠날 기미를 안 보이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방송조차 없다며 게이트 앞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마침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는데, 출발 시각은 밝히지 않고 사정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아시다시피 바르셀로나 시내 교통이 곳곳 차단되어 몇몇 승무원이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내식도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아! 기내식이라….”

기내식을 먹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비행기에서 먹으려고 간식으로만 때우고 저녁식사를 안 하고 있던 참이었다. 방송 후에는 게이트 앞의 소요가 좀 잠잠해지고 사람들이 얌전해졌다. 기내식이 중요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비행기는 2시간 늦게 출발했다. 꽤 지연되었지만 다음날 출근에는 지장이 없고 결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지 싶었다. 비행기가 바르셀로나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비상하자 성공적인 대 탈출에 내 마음도 시원해졌다.

기내식을 맛있게 먹은 후 꿀 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