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고마운 초대
외국어 학원에서 내가 자기소개를 머뭇거리자 혹시 작가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말은 처음 들었는데 묘한 즐거움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내가 그렇게 보이는가? 나도 그런 싹이 조금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내가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그리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몸속 깊이 한줄기 기쁨이 살며시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당시 이 꿈은 닿을 수 없이 높아서 마음속 깊이 숨기고 누구와 나누기를 조심했다.
예술가는 창의적 작업을 할 수 있는 고상한 정신, 감각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신분 상승이 이루어져 상류사회에 입성하는 것처럼, 정신 사회의 고차원 그룹에 들어가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 일 것이다.
김영하의 책 『말하다』 에서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납니다. 우리 마음속의 예술적 충동은 억눌렸을 뿐 사라지지 않습니다. ----- 우리 마음속의 시기심은 우리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마음 저 깊은 곳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74p)
예술가에 대한 갈망과 소망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그동안의 나의 동경이 지극히 본능적이며 보편타당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를 선망하던 내 마음에 대해서 곰곰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남몰래 그것을 하고 싶다고 느낀 것은 내 마음속 어린 예술가의 원초적 욕망이었을까? 예술을 잘 구현해 놓은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은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하고 싶은 것과 똑같은 모방 본능이고?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71p)
미셸 투르니의 말을 인용한 이 대목은 ‘그래서 예술이 우리의 본래 직업이다’는 말 같기도 해서 마음이 시원해졌다.
그러나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 백 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유용한 것도 생산하지 않고 우리 앞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76-77p)
저자의 확실한 격려 덕분에 이제 마음 놓고 예술가를 꿈꿔도 될 성싶었다. 몰래몰래 조심조심히 아니라 좀 더 드러내며 당당하게.
중년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몇몇 지인들이 떠올랐다. 나름 예술 혼을 불태우는 그들이 멋졌고 부러웠다. 음악이나 미술에 영 소질이 없는 나는 글쓰기의 세계가 궁금했다. 갱년기의 힘든 몸이 추슬러지면 그 문을 한 번 두드려 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어떤 설렘이 일었다.
유독 인생 후반에 활약한 예술가들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괴테는 젊은 날 시작한 『파우스트』를 오십 대에 마무리 중이었고, 단테는 [천국]을 쓰며 『신곡』을 완성했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한 시기도 53세가 아닌가.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래는 우리 모두가 다중의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 중의 하나는 예술가였으면 좋겠습니다.(77p)
일찌감치 N 잡러의 삶을 제안하고, 그 일 속에 가장 고상한 ‘예술’도 넣고, 더구나 재능 없이 평범한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니. 얼마나 고마운 선구자인지.
당장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귀한 작가님이 50대는 예술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에 참 좋은 나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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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하 『말하다』 문학 동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