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램즈이어 Apr 08. 2023

어떤 외도 (1)

그 사람의 친구는 랭보

 남편과의 오랜 결혼 기간 동안 딱 두 번 외도를 했고 두 번 모두 딱 들켰다. 외도를 부추긴 장본인은 공교롭게도 우리의 우상 글쓰기와 책 읽기다.

  5년 전쯤 글쓰기 스승님이 이 년간 수필 수업을 받았으니 이제는 픽션으로 넘어가 보자고 했다. 늘 꿈꾸어 왔던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에 기대가 컸으나 도통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숙제를 못했다.

“픽션은 도무지 써지지가 않아요.”

“단편이 수필과 영 다르기는 하지. 그럼 우선 첫사랑 이야기부터 써봐.”

“첫사랑이 없는데요?”

“첫사랑 없는 사람도 있어?”

“네. 변변한 게 없어요. 짝사랑밖에 안 해봐서….”

“그럼 그거라도 써봐.”

“네? 네….”

 대답은 했으나 짝사랑도 글로 쓸 만한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첫 짝사랑은 중학교 때 물상 선생님. 세련된 외모와 위트를 겸한 실력에 반해서 중 3 내내 과학 공부만 했다. 과학 성적이 과도히 잘 나와서 모두들 장차 퀴리 부인처럼 될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사춘기 때 일련의 감정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이름 지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대학 시절로 넘어가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몇 년 간 바라보고 관찰했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현실과 상상을 섞어서 자신이 만들어 낸 신비한 인물에 스스로 빠졌던 일이 아니었을까? 일단 숙제를 하기 위해서, J , 삼십여 년이 지나서 거의 잊고 있었던 제이를 떠올려 보았다.

 글의 힘은 대단했다. 어렵지 않게 대학 초년의 캠퍼스로 시간 여행을 하고, 처음 그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사람과 부딪혔던 몇 번의 에피소드를, 그 풍경과 감정을 세세히 스케치해 보려는데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글 속의 그 사람에게 빠져 현실의 남편에게 냉담해진 것이다. 남편이 갑자기 재미없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중년에는 대부분 무미건조하지만) 물론 내색은 안 했다. 글 쓰는 내내 남편이 의식되어 몰래 쓰려고 노력했는데, 문학과 글쓰기에 문외한인 그는 다행히 별 관심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니 쓸쓸해 보였던 제이에게도 한 두 명 함께 어울리는 급우가 생겼다. 그들은 평범한 남학생들이었는데 제이와 함께 있으면 모두 다 고독한 아웃사이더처럼 보였다. 이들이 담배를 피워 물고 구석자리에서 담소하는 곁을 지나갈 때 혜진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떠 올렸다.

‘랭보, 베를렌, 보들레르가 모여 계시네. 무슨 모의들을 하고 있담?’

인생의 부조리와 허무함 등을 논하고 있을 것 같은 제이의 옆얼굴을 훔쳐보면서 그녀는 그의 친구들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차라리 남학생이었다면 나도 저기 낄 수 있으련만 ….’

 도통 제이와 접촉할 기회가 없어서 혜진은 답답했다.

     

 제이는 제임스 딘 같은 하얀 얼굴, 그리스인 조르바 비슷한 자유로운 영혼에 키가 작고 왜소했다. 글을 쓰면서 평소에 키 크고 체격 좋은 사람을 선망하던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빠졌는지 의아해졌다. 왜 그럴까? 육체적인 외모는 그 사람의 본질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나 보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덮나 보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있는데.

“당신 요즘 뭘 그리 열심히 써?”

 남편이 갑자기 의자 뒤에서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여 점점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본다.

“아냐 아냐, 별거 아냐.”

 중요한 거 들킨 척을 안 하려고 최대한 부드럽게 노트북을 닫았다. 남편은 더 이상의 질문은 안 하고 무심히 다른 일로 넘어갔다.

‘휴~’

 남편은 그야말로 우연히 한마디 한 거였다. 그는 내 글의 내용이나 나의 글쓰기 고민 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내 수필집도 몇 꼭지 밖에는 읽지 못했다. 어휴 다행이다 하고 별 방해 없이 몇 주에 걸쳐 선생님 숙제를 마쳤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첫 외도는 남편의 무의식에게 발각당한 거였다.

그의 의식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그의 육감, 동물적인 감각은 내 마음이 다른 남자에게 빠져있음을 눈치채고, 자연스러운 경고, 고차원의 브레이크를 걸었음이 틀림없다.           


작가의 이전글 예술가가 돼라 지금 당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