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까 충동구매일까?
일주일간 고교 동기들과 다녀온 뉴질랜드 여행은 환상이었다.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귀국해 보니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시누이들과 아주버님이 집에 자주 들러 보살펴서 건강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카톡방에 사진을 올려준 친구들 덕분에 뉴질랜드의 자연과 소녀(?) 들을 보며 추억을 되새김하고 기행문도 마무리했다. 자신이 생각하거나 주위 사람들 보기에도 여행 후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 행복감은 어떤 생소한 증상만 없었다면 완벽했을 터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부터 생긴 것인데 가슴이 짓눌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마음이 불안했다. 한가할 때는 무거운 심정이 더 생생히 느껴졌다.
‘무엇 때문일까?’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금방 짚이는 데가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내 나름 큰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을 해치운 후라 이상한 불안감이 따라다녔다. 누군가와 상의했거나 수다를 떨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비유로 표현하자면 해서는 안 될 듯한 사랑에 빠진 것이고 일상적으로 얘기하자면 충동구매를 한 일이다. 내 사랑의 대상은 고가(高價)의 올가 디자인 양탄자였다. 나는 아주 알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헤프지도 않다. 충동구매를 해 본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고 그중에 값비싼 것은 없다.
충동구매의 사전적 정의는? 미리 계획을 세워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진열된 모습이나 광고 등의 자극에 의해 즉석에서 구매를 하는 비계획적인 행동. (나도 미리 계획을 하지 않았다.) 상품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갑자기 발생하고, 사고자 하는 충동이 강렬하여 저항하기 어려우며, 구매시점에 즐거움 긴장감 등 흥분된 감정이 나타난다. (당시 나도 문득 상품에 대해 호감이 생기고 마음이 붕 떴다.) 따라서 충동구매는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구매일 가능성이 낮고, 나중에 주로 후회한다. (나도 후회를 하지 않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불안감은 충동구매 혹은 사치스러운 쇼핑을 한 것 같은 자책과 남편에게 미리 상의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문제는 뉴질랜드 여행 마지막 쇼핑 날 발생했다. 우리는 로토루아에 위치한 롬니 러그 전시장을 방문했었다. 가이드는 워낙 고가의 제품들이라 살짝 아이쇼핑을 하기 위해서, 또 거기서 제공하는 와인을 맛보기 위해서 들린다고 했다. 전시장은 일층에서부터 고급 주택의 응접실에 온 듯 훌륭했다. 롬니, 후아까야 양과 알파카 모피로 만든 다양한 디자인의 양탄자들이 벽을 장식하고 바닥에 깔려 있었다.
자수성가한 그곳 사장님이 진솔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양털 제품에 대한 소개를 했다.
“러그만 만들어서는 비즈니스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회사가 큰 것은 이 양모피로 침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올가라는 디자이너를 초빙해서 품위 있는 벽걸이제품도 만들었습니다만.”
그러면서 사방 벽에 걸려 있는 고급 러그들을 가리켰다. 하나하나가 오리지널 예술 작품인 듯 멋졌다. 디자이너 올가는 여기서 유명한 분이라고 했다.
포도주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가이드가 어느 여성 스태프를 데리고 왔다.
“이분께 자세히 설명해 드리세요.”
“저는 올가 제품은 구입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좀 가까이서 구경만 해보시지요. 부담 갖지 마시고.”
“저 구경만 합니다!”
내가 마지못해 벽 쪽으로 다가가자, 그녀도 별 부담을 주지 않고 올가의 <플라워 > 제품 앞에서 설명만 했다.
‘이렇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고도의 훈련된 상술인지 몰라.’ 나는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으려 애쓰며 생각했다.
벽에 전시된 올가의 <플라워>는 커다란 빨간 꽃잎이 두 장 세로로 그려져 있고 흰색의 마가렛 꽃잎 다섯 장이 중간중간 박혀 있는 구성이었다. 양탄자라기보다 하나의 훌륭한 미술 작품이었다. 양털의 촉감도 침대 매트와는 사뭇 다르게 고고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살 생각도 없으면서 벽에 전시된 올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했다.
“저기 배 그림은 올가의 최신작이랍니다.” 그녀가 다른 쪽 벽면에 있는 금방 눈에 띄지 않는 연한 색 작품을 가리켰다. 옅은 회색 바탕에 서양배가 밝은 겨자 색으로 네 개 그려져 있는데 파스텔 톤의 은은함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급 재질에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에요. 벽에 걸 수도 있고 바닥에 깔아도 되지요. 뉴질랜드 다녀가시는 김에….” 그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아! 멋지긴 한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척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그냥 스쳐 지나가며 잊어버리는 남성은 없을 것이다. 그 미모에 감동했다면 필연적으로 한 번 더 보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질 것이다. 나도 비슷한 마음이 되었다. 이 작품을 하나 우리 집 거실에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년 전이었다면 별 저항 없이 구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우리 집 형편엔 무리인 것 같았다. 이 제품과 우리 집 경제 현실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랑해도 될까요?’라는 노래 제목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가 젊은 이 들에게 애기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많이 좋아한다면 물어보고 뭐고 하는 것이 아니야. 그냥 사랑을 시작하는 거야.' 그 속삭임이 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격은 어느 정도 하는데요?”
그만 스태프에게 속마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이 제품들은 몇 친구가 구매한 침대매트보다 1.5배 정도 비쌌다. 올가라는 디자이너의 브랜드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성을 되찾으려 애쓰며 말했다.
“한국 가서 생각을 좀 해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너무 좋은 기회이니 계약서를 우선 적어놓으시고 나중에 천천히 입금하시면 어떨까요? 금액도 세 번에 나눠 내셔도 됩니다.”
한국 가서 영 아니다 싶으면 전화 한 통화로 취소해도 되겠다 싶어 고민 중에 그녀가 권하는 대로 해버렸다.
“배 디자인이 편하게 느껴지긴 한데….”
“뭐니 뭐니 해도 <플라워> 예요. 인기 있는 간판제품이랍니다.”
계약서에 플라워 디자인으로 명시했다.
그날 저녁 호텔방에서 한 친구가 낮 동안의 쇼핑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들 양털 매트 누구누구 샀니?”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올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작품과 사랑에 빠져서, 서약을 했고, 그래서 3주 후면 그녀가 우리 집에 올 거라는 애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과분한, 해서는 안 될 사랑을 시작한 것 같아서였다. 그 사랑의 서약은 사인은 했지만 어딘지 현실감이 없고, 곧 무효화될 운명처럼 느껴졌다. 내일 공항에서 전화로 취소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없던 일이 되니까…. 그날 저녁 올가 생각에 잠을 뒤척였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니까…’
‘간절한 사랑도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어.’
‘이별을 준비하고 슬픔을 감수해야 한다’
다음날 공항에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출국검사대를 통과한 후 조용한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올가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사실 몇 년 전 만해도 마음의 갈등 없이 매트 구매가 가능했을 것이다. 약 이년 전부터 우리 집 경제 상황이 빠듯해진 것이 문제였다.
그때까지 남편이 우리 가정의 금고지기가 되어 모든 잉여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며칠 잠을 뒤척이던 남편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여보 할 애기가 있어.”
“무슨?”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유쾌히 대답했다.
“요새 중국증시가 심상치 않더니.”
“우리 집도 중국 증시에 영향받아요?”
“그게….”
중국증시가 유망할 거라고 부추기던 친구의 조언을 따른 것이 문제였다. 증시 하락과 함께 투자했던 자금이 거의 바닥난 것을 남편은 힘겹게 고백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건강하고 일할 수 있잖아요. 건강을 잃지 않았음 된 거예요.”
내가 아무리 괜찮다 해도 남편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난 일체 돈 관리 안 할게. 이제부터 당신이 해….”
우리 집 경제 부총리였던 남편의 자진사퇴로 내가 금전 관리를 하게 되었다. 관리할 만한 자금이 남아 있지 않아, 그저 알뜰히 생활하고 여유 자금이 생긴다면 저축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동안의 문화부장관에다 경제 부총리까지 떠맡게 된 셈인데, 내 맘 속의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분간 잉여 자금이 좀 모일 때까지 긴축을 해야 합니다. 이 시국에 예술 작품이라뇨?”
경제부총리는 얼른 올가 작품을 취소하라고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예술이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향유하는 것입니다. 그 작품을 구입한다고 당장 밥을 굶지는 안잖아요? 올가 양탄자가 깔린 거실은 무척 우아할 거예요.” 문화부 장관은 감성에 호소했다.
뜬금없이 여성부 차관까지 나서서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 금액이면 말기 암 환자 친척을 도울 수 있어요. 시리아 난민 여성을 위한 후원금도 되고.”
30여 분 간의 치열한 마음속 회의 끝에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거기 롬니 양털 매트 전시장이죠?”
“네, 그런데요.”
“어제 단체로 양털 매트 구경했던 팀인데요. 저는 올가 양탄자 계약 했었어요.”
“네? 그래서요….” 담당 스태프는 취소에 대비하려 듯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올가 작품 <플라워> 말고 배 네 개 그려진 것으로 바꾸려고요.”
플라워 제품의 색상이 강렬해서 계속 보기에는 부담될 것 같았다.
“아! 네! 그렇게 바꿔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그녀는 경쾌하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내 마음속 회의의 막바지에, 문화부 장관의 간절한 호소가 장중을 제압했었다.
“뉴질랜드 추억이 어린 예술품 하나쯤 소장하는 것도 두고두고 정신건강에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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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꾸러미를 풀어서 펼쳐 놓은 선물들을 보고 남편은 안심하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를 위한 마사지 제품, 어린 손자를 위한 메리노 양 장난감, 우리 부부를 위한 눈 영양제, 마누카 꿀, 열쇠고리 등이었다. 남편은 ‘큰돈은 안 썼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안도하는 그 표정을 향해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남편은 종종 내 쇼핑에 놀라곤 했다.(내 생각에 별로 산 것이 없을 때도) 자신의 물건을 사다 주어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와이셔츠든 양복이든 최소한의 수량으로 꾸려가기를 원했다. 근검절약으로 자라왔던 원 가족 분위기 탓인 것 같았다.
늘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얘기했었다.
“우리 집에서 돈은 내가 다 써. 애 아빠, 술도 안 마시지 골프도 잘 안 하지.”
“좋겠다. 돈이 착착 모이겠구나.” 친구는 부러워했다.
“쇼핑에다, 이것저것 배운다고 학원비도 많이 써서…, 남편에게 좀 미안하기도 해.”
증시 사건 후 어느 날, 옷을 좀 사고 싶은데 여느 때처럼 돈 안 쓰는 남편을 생각하며 자제하다가 문득 주객이 전도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소모한 거대한 액수에 비하면 내가 쓴 돈은 푼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후 까짓 열심히 쇼핑하자 하고 생각도 했지만, 이번엔 경제부총리라는 직함 때문에 과소비를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경제가 부총리 마음대로 라지만 대통령에게 중요 지출은 보고 해야 하는 법. 매일매일 기회를 엿보는데 마땅치 않았다. 양탄자 가격을 사실대로 고했다가는 너무 놀랄게 분명해서 좀 두리뭉실 얘기하려는데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고와는 별도로 그 큰 금액도 마련해야 했다.
올가 제품 할부의 첫 지불 날짜가 돌아오고 있었다. 다시 한번 취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송금하지 않고 전화만 한 통화해서 안 사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상부 보고와 큰돈 마련이라는 두 가지 부담을 털어 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러면 이 불안감이 싹 없어지겠지. 솔깃해서 또 한 번 망설였다. 그런데 이미 상상 속에서 거실에 멋지게 펼쳐 있는 올가 작품이 무(無)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비상시를 위해 꼬불쳐 놓은 돈을 찾아 눈 딱 깜고 1차 송금을 해 버렸다. 이제 취소가 복잡해졌으므로 사는 방향으로 가야 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호시탐탐 대통령께 양털매트 이야기를 하려는데 여의치 않았다. 어느덧 3주가 흘러갔다. 며칠 후면 도착할 거라 이래저래 남편에게 고백을 해야 했다.
대면해서 이야기할 용기가 없어서 카톡에다 문자를 넣었다.
“뉴질랜드에서 거실용 양탄자를 하나 샀었어요. 순 양털인데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두근두근 응답 문자를 기다렸다.
"잘했어요."
이뿐이었다. 남편은 쿨하게 가격이고 뭐고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내가 이년 전 그가 증시에서 잃은 정확한 액수를 쿨하게 물어보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휴…."
일차 관문을 통과한 듯 마음이 놓였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은 가격을 묻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했던 대통령과의 일문일답이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잔뜩 긴장했던 시험을 싱겁게 마친 느낌이었다.
며칠 후 배 그림 도안의 올가 양탄자가 도착했다. 뉴질랜드에서 만져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감촉도 좋고 훌륭해 보였다. 거실 탁자를 옆으로 치우고 소파 앞 넓은 공간에 펼쳐 놓았다. 어렵사리 사랑하는 작품을 만난 기쁨에 얼굴을 비비며 감개무량해했다.
"여보! 좀 누워봐. 엄청 포근해 "
"응, 나중에. 당신 무척 좋아하네."
남편은 흥분한 내 모습을 의아해했다. 한참을 눕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그 위에서 스트레칭도 했다. 푹신하고 커다란 네모 위에 여럿이 앉아 오순도순 애기도 나누고, 화투도 치고 카드놀이도 하면 좋겠다 싶었다. 모두가 일찍 잠자리에 들면 나만의 작은 공간이 될 것이다. 그날 저녁 소파발치에 기대어 양탄자 위에 발을 쭉 뻗고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잠이 오려하니 그 위에 가만히 누워 보았다. 롬니 양털의 감촉이 경이롭게 느껴지며 그 나라가 생각났다. 아오테아로아, 낮고 긴 흰 구름의 나라!
아스라이 나는 연두색 초원에 누워있다. 롬니 녀석들은 한가로이 떼를 지어 내 주위를 뛰어다닌다. 밝은 옥색의 광활한 호수와 빙하를 얹은 산들이 나타나고, 빗줄기를 맞아 사방 대서 폭포수가 떨어진다. 황금벌판의 비안개 사이로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오색 무지개가 떠있다.
<5년이 지나 좀 낡아진 올가 양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