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을 꿈꾸던
“따님이 입으실 건가요?”
장미꽃 장식이 달린 연보라 슬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내게 점원이 다가오며 물었다.
색은 은은했지만. 옷감은 하늘하늘 살이 다 비칠 것 같은 섹시한 디자인이었다.
“아, 네? 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놀라서 본의 아니게 진실을 감추었다. 내게는 딸이 없고 자신이 입을 거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멋진 잠옷을 하나 사러 왔는데 마침 마네킹이 입고 있는 야한 슬립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여름도 다가오니 잠옷을 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급 브랜드라 세련됐어요. 마침 세일 기간이니….”
점원의 친절한 권유에 바로 결정했다.
“예쁘게 선물 포장 해 드릴게요~.”
선물 포장이 필요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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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하고 야한 잠옷을 사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친구의 한마디가 무심히 살던 일상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막내가 입대하면서 두 아들이 모두 군대에 있게 되었다. 두 아들이 모두 국방의 의무 중이라 하면 많은 이들이 격려와 존경심을 표했다. 어깨에 빡 힘이 들어가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떳떳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큰아들은 얼마 후 전역이지만 그때까지 마음 놓을 수 없어서, 서해와 휴전선 상황 등을 체크하며 한반도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긴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친구 한 명이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두 아들이 모두 군대에 있어? 아이고 신혼이구먼!”
“신혼? 무슨?.”
“둘만 있잖아? 아들 전역 목 빼고 기다리지 말고, 요 때 신혼을 즐겨!”
‘아들들 없을 때 신혼을 즐긴다….’
친구의 조언은 갑자기 내 결혼 생활의 한 부분-잃어버린 신혼의 나날-을 회상케 했다.
워킹맘으로 결혼 6개월 차부터 시부모와 함께 살며 살림살이와 아이들 양육을 도움받았다. 누가 보아도 화목하게 상부상조하는 대가족이었지만 신혼의 낭만은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가장 큰 불편은 저녁 시간에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지 못한 것이다. 잠옷들은 보통 천이 얇아 몸매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비치기 때문에, 거실에서 시아버지와 마주칠 것을 대비해야 한다.
어느 날 속상해서 시부모와 함께 사는 어려움을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의복이 제일 문제야. 여름에 함부로 벗을 수도 없고. 잠옷도 못 입어, 시아버님 땜에….”
“너, 너만 불편한 거 아니다. 너희 시아버님도 너 때문에 힘들어. 여름에 함부로 못 벗고….”
시아버지 역시 나처럼 힘들 거라는 친구 이야기에 마음을 잡았지만, 대책 없이 샀던 잠옷들은 장롱 속에 박혀 있어야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나이가 되자 엄마가 잠옷 안 입는 것을 항의하기 시작했다.
“잠옷 갈아입자. 어서~”
“네! 그런데 엄마는 왜 안 갈아입으세요?”
“으응. 엄마는 좀 있다가….”
엄마가 할아버지를 의식해서 못 갈아입고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잠옷 갈아입는 시간에 함께하기 위해 저녁 시간에 편하게 입을 실내복을 샀다. 애들에게는 그 실내복을 엄마 잠옷이라고 했다. 그러나 간혹 란제리 가게를 지나갈 때 예쁜 잠옷이나 슬립을 보면 그림의 떡이로구나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중학생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에서 의복의 자유가 찾아왔다. 시어머니는 같은 여성이라 어떻게 입던 문제가 안 되었다. 어느 날 마음먹고 멋진 잠옷을 사러 나섰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는 듯 레이스가 많이 달린 핑크빛 슬립을 선택했다. 저녁 시간에 이제 나도 잠옷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겠구나 하며 마음이 부풀었다. 그날 저녁을 먹고 새로 산 잠옷으로 갈아입고 한번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옷이 날개라고 나도 몇 년 젊고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막내아들 목소리였다. 아들을 반기러 나가는데 내 옷차림이 영 마음에 걸렸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똑똑. 엄마 저 왔어요. 배고파요.”
“응 잠깐, 잠깐. 금방 나갈게.”
나는 옷을 다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비치고 야한 잠옷을 사춘기가 된 아들 앞에서 태연히 입고 어정거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시아버지가 아니라 다 큰 아들들 때문에 저녁 시간에 의복을 갖추어 입어야 했다. 그 예쁜 잠옷은 또 장롱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이 커서 군대에 갔으니, 방해꾼 없어진 김에 신혼의 꿈에 젖어보라는 친구의 조언이 솔깃해진 것이다. 그래, 녀석들 없을 때 멋진 슬립을 사서 저녁 시간에 입고 한번 기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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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나는 새로 산 슬립을 입고 좀 서늘해서 그 위에 카디건을 걸쳤다, 처음으로 하늘거리는 가벼운 옷을 입고 거실을 넘나들며 남편과 함께 TV를 보았다.
“당신 좀 추워 보이네.”
남편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포도주도 한잔하고 또 다른 분위기를 추가로 연출했어야 했나 보다. 일에 지친 남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일상적인 저녁과 다름없이 끝나버렸다.
‘뭐가 문제지?’
이제 분위기를 즐길 타이밍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나이를 들어버린 것 같았다. 잠에 곯아떨어진 남편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다.
‘하긴, 애 아빠는 내가 파마를 해도 몰라봤으니까.’
‘남편도 이제 갱년기를 하나 보다.’
‘오십에 신혼을 꿈꿀 수는 없는 법이지….’
이번에도 내 보라색 슬립은 빛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