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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Mar 18. 2023

지젤과 나

수줍은 꿈의 발견

 친구랑 나랑 엘지 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것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다다오가 설계한 공연장의 건축미도 감상하고 둘 다 좋아하는 발레도 보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려는 것이다.

 마곡 지구의 엘지 아트 홀은 지하철역에 위치해서 접근성이 좋았다. 나는 5호선, 강남의 친구는 9호선을 이용했다. 10분 남짓 걸으면서 깔끔하게 지어진 엘지 사이언스 센터 내부의 건물들을 통과했다. 현대적이며 세련된 빌딩은 각 동의 간격도 넓고 사이사이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서울 식물원이 아트센터에 인접해서 함께 고즈넉한 풍경을 선사했다.  

 일층 높이에서 계속 걸어온 나는 안도 다다오의 튜브를(달팽이 모양의 통로), 친구는 마곡나루역과 직접 통하는 스텝 아트리움을 통해 들어와 게이트 아크에서 함께 만났다.

 중년 이후 폐쇄 공포증이 생겨서 객석은 바깥 자리로 예약했고 또 화장실 문제를 최소화하느라 커피는 끝나고 마시기로 했다. 공연이 시작되려는 즈음, 앞에서 이층 첼제 난간이 90도로 아래로 서서히 펴지며 시야가 시원해졌다. 콘서트 홀 내부는 이런 첨단 기술뿐 아니라 실내 공기까지 쾌적했다.

 1막은 살구 빛 색채의 시골 무대를 배경으로 처녀 지젤과 왕자의 사랑 이야기이다. 발레리나의 우아한 아라베스크 동작은 언제나 뭔지 모를 꿈을 불러일으킨다. 2막에서는 어슴푸레한 검푸른 색을 배경으로 하얀 정령(精靈)들의 군무가 펼쳐진다. 모두가 흰 면사포 같은 것을 쓰고 시작했는데, 어느 동작 후에 순식간에 벗겨져서 신기했다. 튀튀의 어디다 감춰두었을까? 알브레히트 왕자의 독무(獨舞) 때 무척이나 고난도 동작이 나와서 모두들 큰 박수를 쳤다. (두발을 여섯 번 교차하는 이 동작의 이름이 ‘앙트르샤 시스’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커튼콜 때 중요한 사진을 충분히 찍고서 카페에서의 시간을 확보하려 일찍 나왔다. 차 마시는 것을 참았기 때문인지 공연의 감동 때문인지 커피는 무척 향긋하고 달콤했다. 나도 모르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얼마 전 발레핏 시작했어. 필라테스를 배우려다 이왕이면 자세도 교정할까 해서.”

“와우. 그럼 나중에 발레도 배울 수 있겠네?”

“무슨? 이 나이에. 건강 삼아 근력과 스트레칭을 기르려는 거지.”

“왜? 취미 성인 발레, 요사이 유행이잖아? 그렇게 발레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무 다리며 나이 탓을 하면서 터무니없는 일인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솔깃했다. 돌연 발레를 배우라는 친구의 조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숨겨있던 내 갈망을 표현해 준 것 같았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가는 것처럼 마음이 부풀기 시작했다.

‘실은 그런 우아한 동작을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구나.’

 초등생 어린 나이 때는 여자아이로서 몇 번쯤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뚱뚱했던 처녀 시절을 지나 두 아이를 다 키우기까지 발레 배우기를 떠올린 적은 없었다. 힘이 다 빠진 이 나이에 웬? 시간이 여유로워져서 그럴까? 중년 아줌마의 뻔뻔함일까?

 갑자기 홀에서 커다란 환성이 흘러나왔다. 발레는 성악이나 오케스트라처럼 앙코르가 없을 텐데 이상했다. 처음엔 무시하고 대화를 계속했으나 그 왁자지껄한 소란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아보러 호기심 많은 친구가 콘서트홀로 다시 들어갔다.

 그 소란은 그날의 남자 주인공 알브레히트 역 기욤 디오프가 에투알(별:수석 무용수)로 승급되어서였다. 그 발표는 무척 대단한 것인지 관중은 그를 축하해 주려고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파리오페라 발레단의 최고 무용수가 되었으니 아마도 그의 꿈이 실현된 자리였으리라.

 누군가가 별이 된 그날 저녁 내내 나는 나의 작은 꿈과 실랑이를 했다. 발레 배우기를 버켓 리스트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발레핏을 1년 정도 열심히 한 후 성인 발레 반을 노크해 보자.’

‘이상한 동작을 한다든지 어지러워해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그냥 스트레칭이나 열심히 하자.’ 두 마음을 오갔다.

 다음날 신문에 쉬제 (솔리스트)이면서 이번 <지젤> 공연에 참여한 한국인 강호현 양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한예종을 졸업하고 세계 최고(最古)의 발레단에 입단해서 군무를 이끌며 고국 공연을 했으니 꿈을 이루었다고 쓰여 있었다. 고운 선과 표현력으로 주목받는다는 그녀는 공연을 잘 마친 흡족함의 미소를 띠었다. 나도 나의 수줍은 꿈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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