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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Apr 11. 2023

장내시경의 추억

사약 먹던 날

 윗트의 대가 김분주 작가 글을 읽다가 대장내시경 단어에서 멈칫했다. 옛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대장내시경 알약이 출현해서 한결 수월하다고 들었다. 알약도 힘든 분이 계시면 과거 액체 세정약 시절의 괴로움을 한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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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표정이 왜 그래?”

“아 …. 후!”

“꼭 사약(死藥) 앞에 앉은 사람 같네.”

 식탁에 앉아 한숨만 푹푹 쉬는 나에게 남편이 가엾다는 듯 한마디 하며 지나갔다. 맞다. 나는 한 시간째 사약 아닌 사약과 대면하여 앉아 있었다. 너무도 먹기 싫은 약을 억지로 먹어야 하는 괴로움이 딱 죽음에 이르는 약사발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또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당위성이 꼭 임금님이 내린 사약과 흡사했다.  

“사약을 받으라!”하며 왕의 교지를 크게 외치는 좌승지는 없으나 A4 용지에 가지런히 적힌 장내시경 전 처치용 세장제 복용법은 그의 외침만큼이나 잔인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역겨운 액체를 오백 리터 씩 네 통이나 먹어야 해?”

 괜히 남편에게 항의하며 트집을 잡았다. 장내시경을 여러 번 한 적 있는 선배답게 남편은 친절히 설명하며 나를 달랬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간편해 진거야. 약도 맛이 좀 낫고….”

“이게 맛이 나아진 거라고? 말도 안 돼!”

“조금씩 먹다 보면 어느새 없어져.”

“아! 도무지 줄지를 않아. 줄지를. 아직도 세 통이나 남았어.”

  이제 한숨을 넘어서 엉엉 울고 싶어졌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며 조금씩 홀짝이면 진도를 나갈 것 같아서 통을 들고 TV 앞에 앉았다. 짠 바닷물 같은 맛인데 비타민 씨가 첨가되어 신맛도 났다. 바닷물이야 잠시 호흡을 놓쳐 코로 물먹을 때 먹어 봤지만 짭짤해도 거부감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약은 도대체 맛이 이상했다. 억지로 참고 한통을 마셨는데 또 세 통을 더 마셔야 한다니 미리부터 질려 버렸다. 텔레비전 앞에서 흥미로운 줄거리 때문에 괴로운 맛을 잊으리라 생각했는데, 마셔지지는 않고 오히려 드라마의 맛만 버렸다.  

 두 번째 통을 어떻게 소모하나 궁리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괴로움이 시작되었다. 배가 아프며 안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급히 화장실에 갔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세장제 오백 리터들이 두 번째 통을 들고 꺼이꺼이 조금씩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또다시 뱃속이 요란했다.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야 비로소 임금님 교지의 뜻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흰 종이에 적힌 내용은 “사약을 받으라.”였지만 진정한 하명은 “설사를 하여라. 밤새도록”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통부터는 액체를 먹는 고역과 화장실 가는 노역을 치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먹은 것도 없이 정상 근무를 한 날이라 기운이 빠지며 혼미해졌다. 세 번째 통을 마친 시각은 밤 11시였다. 네 번째 통이 남아 있고 그 후 물을 네 통 더 마셔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어떡한담….’ 

 걱정하며 한 모금을 마시니 웩하며 속이 몹시 울렁거렸다. 더 마시면 토할 기세였다. 

‘이 약의 목적은 위로 뭐가 나오는 게 아니야. 아래로 나와야지.’ 중얼거리며 나는 마지막 네 번째 통은 포기하기로 했다. 교지를 어기면 어떻게 될까 걱정되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생수 네 통이 또 남아 있었다. 가스로 가득한 배에 물 2 리터가 더 들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다행히 물은 새로운 맛이 났다.

“여보 꿀맛이야 꿀맛!”

“뭐가?”

“생수 맛이. 사약 먹다가 물마시니 물이 꿀맛이네!”

 자명종을 6시에 맞추어 잠자리에 누웠다. 중간중간 화장실 가라는 신호에 일어나야 했고, 누워있는 동안에는 온갖 생각을 하며 뒤척였다. ‘네 번째 통을 다 먹지 않아서 혼나면 어떡한담.’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적어 놓은 것 같은 빨간 글씨의 경고 비슷한 문장이 생각났다.   

  

약은 다 드셔야 합니다. 변이 안 나와도 장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찌꺼기, 덩어리가 있을 경우 검사 진행이 어려워집니다.   


‘나도 검사 진행이 어려워 도중에 퇴짜 맞으면 어떡하나? 이 고생을 또 할 수는 없는데….’

 다음날 일찍 부스스 일어나 아침 용 약과 물을 마셨다. 다행히 그 약은 과히 어렵지 않았다. 걱정 반 뻔뻔한 마음 반으로 병원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나를 찬찬히 살피며 질문을 했다.

“세장제 모두 잘 드셨어요?”

마치 어제저녁의 내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다. 

“아! 네, 그런데 ….”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차마 한통을 스킵했다고 실토할 수는 없었다.

“저기 회복실 옆 화장실에서 변을 한번 보시고 물을 내리지 마세요!”

“예?”

“장이 잘 청소되었나 한번 봐야 해요.”

“아니! 확인까지 하세요?”

  조마조마 숙제 검사가 무사히 통과되었다. 

  하얀색 주사를 맞고 회복실에서 깨기까지 잠시 마음도 피난 갔다 돌아오니 다시 걱정이 시작되었다. 

‘검사가 잘된 걸까? 결과는 어떨까? 장이 잘 비워지지 않아서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면 어떡한담?’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장이 깨끗합니다. 용종도 하나 없이.” 선생님의 말씀은 짧았다.

“아, 네! 휴, 감사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질병이 없는 것도 다행스러웠지만 세장제 한통 남긴 것을 들키지 않은 것도 뿌듯했다. 전날의 고생이 고생으로 여겨지지가 않으면서 내가 왜 그리 엄살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은 기분이 되어, 허기도 채우고 한숨 돌릴 겸 병원 근처의 죽 집에 들어갔다. 호박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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