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께 생긴 일 (2)

골프와 매사냥이 닮은 점, 댓글 픽션

by 램즈이어

“왜 저를 초대하셨나요?”

“이 성의 주인 알리스테어 백작께서는 작가님이 뤼미에르 남작의 후손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요? 저는 보시다시피 동양인으로…. 그런 이름의 조상은 금시초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뤼미에르 맥마봉 남작의.”

“뭔가 대단한 오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와 조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강력히 반박하려는 이장님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던컨 로버트슨이 들려준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21년 제5대 서덜랜드 공작(5th Duke of Sutherland)의 던로빈 성에서 성대한 무도회가 열렸다. 몇 년 전 화재의 상흔을 씻어내고 더욱 수려해진 던로빈 성의 재탄생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갓 칠해진 페인트 향과 새롭게 짜인 시카모어 나무 냄새가 성 안에 가득하던 그날 밤 공작의 둘째 딸 레이디 엘스패스는 시인 뤼미에르를 처음 만났다.

“시종장, 저기 춤출 생각 없이 창 쪽만 배회하는 젊은이는 누군가요?”

“마님, 저분은 시인입니다. 던로빈 성에 대한 멋진 시(詩) 때문에 초대받았습니다. 아직 무명이지만 떠오르는 별 (rising star)이시지요.”

문학소녀 엘스패스는 그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춤곡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마음을 빼앗긴 엘스패스는 그와 스텝을 밟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뤼미에르가 앞으로 춤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로버트 번즈처럼 스트래스 스페이나 지그춤이라도….”

"번즈가 이 성의 화려한 돌을 보았다면, 그 벽을 세우기 위해 쫓겨난 농민들의 눈물을 노래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뤼미에르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저녁나절의 대화라곤 없었던 듯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 엘스패스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다.

‘아니, 성(城)을 찬양하는 시(詩) 짓던 때는 언제고?’

‘우리 조상의 하이랜드 클리어런스를 용서하지 못하는 걸까?’ *

두 사람의 썸은 큐피드 화살을 차단하는 보이지 않는 보안 감시반에 의해 차갑게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검열을 우습게 여기며 가뿐히 뛰어넘은 커플이 있다.

저녁 내내 공작의 큰 영애 마이리 서덜랜드는 맥도널드 클랜의 상남자 이언 맥도널드와 춤을 추었고 사랑에 빠졌다. 격정적인 그들은 뜨거워졌고,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언의 집안은 클랜의 상위 그룹이지만 평민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엘스패스는 아버지를 졸라 뤼미에르에게 게일어 과외를 받았다. 그는 스코트어(Scots)로 시(詩)를 쓰며 인정을 받게 되고, 조상의 이미지를 세탁하고 싶은 공작은 그를 던로빈 성 도서관장에 임명했다.

그 해 화창한 5월 초하루 서덜랜드 공작은 성의 발코니에서 프랑스풍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양한 채색의 녹음들이 합창하며 그의 능력을 칭송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옛날 느부갓네살 왕과 비슷한 심정이 되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다니엘 4:30)

왕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로부터 어떤 목소리를 들었고, 공작은 그날 밤 포르투나(Fortuna)의 펀치를 맞았다. 마냥 다정했던 운명의 여신이 얼마나 가혹한 뒤통수를 날렸던지.

저녁 식탁에서 결혼 문제로 큰 딸과 대판 말싸움을 벌인 공작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토씨마다 말대꾸하는 녀석을 방에 가두라고 명령을 내린 터였다.

‘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감시 해제 명령을 내릴까?’

착잡한 마음으로 딸의 창문 쪽을 바라보았을 때 벽을 따라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뭔가 허연 것을 밧줄처럼 만들어 타고 내려오는 물체. 살살 하강하던 마이리의 눈과 마주쳤다.


“아니 네가!”

“앗! 아버지…”


딸은 너무 놀라 줄을 놓쳤고, 눈빛이 마주친 곳은 성벽의 꽤 높은 지점이었다. 눈부셨던 던로빈 성의 칼라에 블루 색조가 입혀졌다.

엘스패스의 게일어 실력이 붙어가며 두 사람의 썸도 무르익고 있었다. 시인 뤼미에르의 명성도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맺어질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던로빈 성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귀신 나오는 방이 있다는 소문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딸의 흐느낌이 밤마다 들린다는 것이다. 사치스러운 마이리가 다양한 드레스를 맞추며 입어보던 재봉사의 방에 자주 출현 한다는.

신경이 몹시 예민해진 공작은 이 귀신을 퇴치한 자에게 커다란 보상을 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게일어 과외 시간에 엘스패스가 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이 귀신 물리칠 궁리 해보아요.”

“…”

“언니는 스페인어를 무척 싫어했는데….”

“한번 스페인어 주문(呪文)을 만들어 볼까?”

“마저마저. 밑져봐야 본전이니.”

두 사람이 고안한 방법은 뜻밖에 효험이 있었다. 처음에는 마이리가 추락했던 밤 11시경 재봉사의 방에서 크게 외쳐 보았다.

“올라 바르셀로나 마르가리따 에스빠뇰라 베싸메 무쵸! # % $ & @”

며칠간 어떤 흐느낌이 사라졌다. 날이 갈수록 다른 난해한 스페인어 단어들도 귀신이 싫어하는 것이 밝혀졌다. 낮 시간의 낭독이 밤까지 먹혔다. 특히 나이 지긋한 아줌마들 톤이 효과가 좋아, 아예 그 방 앞에 스페인 관광객을 모셔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다가 귀신 쫓는데 쓰이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재봉방 마네킹 앞에서 재미나라 여러 버전의 던로빈 성 귀신 이야기를 나눈다.

“께 까스띠요 딴 보니또, 뻬로 꼰 판따스마스! 아이, 께 미에또! # % $ & @”


공작은 뤼미에르가 귀신 무찌르는 공(功)을 세웠음에도 딸과의 사랑을 모르는 척했다. 엘스패스는 애간장이 탔지만 아버지의 상처를 알기에 섣불리 어떤 간청을 할 수 없었다. 부녀간의 묘한 줄다리기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심리전(戰)이 끝나는 어떤 사건이 생겼다.

매사냥은 스코틀랜드에서도 가문의 위엄을 보여주는 전통이다. 날씨 좋은 이른 가을날 뤼미에르는 도서관장 자격으로 던로빈 성 고위 관리자로 이뤄진 공작의 사냥 모임에 합류했다. 공작은 몇 년 전 바티칸 교황청 도서관에서 13세기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의 <매사냥의 서(書)>를 봤던 자랑을 했다. 매사냥 마니아이던 황제가 30년 동안 관찰하고 실험한 내용을 담아놓은 책이다. 아무도 그 이야기에 짝짜꿍을 할 수 없었는데 뤼미에르는 로마에 살던 친구 덕분에 그 내용을 꿰고 있었다. 심지어 도서관장 자격으로 조심스럽게 책의 저자가 사실은 아들, 만 프레디라고 (황제의 책은 분실되어 남아있는 것은 아들, 만 프레디 판본임을) 교정해 주었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공작의 마음속에 뤼미에르는 이미 사위로 자리 잡았다. 현명한 엘스패스의 인내의 결실이자 어떤 심리작용이기도 했다. 감정적 착각이나 시간적 왜곡이 일으킨. 매사냥에 능숙하면서도 공작에게 깍듯했던 뤼미에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팔코나리우스(매 시종관)와 닮아 보였다. 그 시절 황제의 매사냥 총책임자는 사후(死後)에 까지 충성을 다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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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대 여백작인 서덜랜드 백작부인과 그녀의 남편 스태퍼드 후작은 양을 키우기 위해 수만 명의 소작농을 강제로 내쫓았다.

** 이 문장에서 '보안 감시반'이라는 표현은 yeon 작가님의 글 [보안요원반 연대기] 속의 문장에서 모방한 것입니다.

## 마봉 작가님 <백수 스코틀랜드 여행기> 28화를 읽고 적어 본 댓글 픽션입니다. 많은 내용과 표현들을 거기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mabon-de-foret/381